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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7월31일 일요일 12 (제115호) 기획 이 글 은 조선 중기 중 종~명종 연 간에 활 동했 던 박세 무(朴世茂,1487~1564)의 생 애를 조 망하 기 위해 작 성되 었다 . 함 양 박 씨 는 16세 기 사 림 세 력이 정치 를 주도 하는 시 기 박세 영(朴世榮),박세무,박세옹(朴世 죕 )등을배출하였다.이시기박세영등은사림사회와연망(連網)을형성하면서활동하 였다.청강(淸江)이제신(李濟臣)은박세영의묘갈명 을 찬 술하 면서 , “동 국(東國)에 현벌 (賢閥)이 많으 나 효우 (孝友)로 이름 난 것은 박씨 에 앞서 는 자 가 없다 ”며 함 양 박씨 의 효 우를 높 이 평 가하 기도하였다.이글에서조망하고 자 하 는 박세 무는 사 림 세력 과의 연 대 속에 서 활동 한 인 물 로, 역사 상 븮동 몽선 습(童蒙先習)븯의 저 자로 잘 알 려진 인 물이 다. 지금 까지 박 세무 에 대한연구는본격적으로진행되 지않았다.이는일단해당인물을규명하기위한자료의한계에서그원인이있다고보인다.이런상황에서도박세무를“ 이단을배척하는데매우적극적이었던인물로평가 하거나“곧은성품과학문적배경때문에권신들의배척을받은”인물등으로평가한연구가제출된바있다.한편박세무 와관련된논의는븮동몽선습븯의 저자 와 관련 한 논 란 속에서함께거론되었다.조선시대에는줄곧븮동몽선습븯이박세무의저술임이말해졌고이후일제강점기를거치며현대 까지도이런견해는한동안유지되었다.그러나1981 년안춘근(安春根)이윤인서(尹仁恕,1536년문과급제)의발문(跋文)이붙은븮동몽선습븯을발견하고이것이지상(紙上)에 특필되면서 븮동몽선습븯은“세계최초의 교과서”로 그저자는민제인(閔齊仁)이라고하는설이제기되었다.이후븮동몽선습븯의저자를둘러싸고논란이제기되며,박세무단 독저술이라는견해,민제인의단독저술이라는견 해,주저자는박세무이고공동저술은민제인이하였다는견해,민제인이주저자이고공동저자로박세무를비롯해김안국 등이참여하였다는견해등이제출되었다.이글은 부족하지만박세무에대한선학들의연구를바탕으로박세무의생애를조망하고,그의사고나사상적지향성을구체적으 로검토하고자한다.이를위해먼저그의가계와인 적 연 망이 라고 할 수 있 는 네트 워크 를 살펴 보고 , 이어 그 의 생애 와 사상 적 지향 성을 경 세론 이라 는 입장 에 서 정 리 하고 자 한 다 . 많 은 질정 을 바란 다. 함양박씨는박습(朴習, 박세무의 고조부)이후 아 들 박의손(朴義孫)이 만 호(萬戶)에재직하기도하 였으나, 15세기에는 사환 (仕宦)자가 찾아지지는 않는다.이는바로세종초 반에 발생한 강상인(姜尙 仁)의옥사에박습이연루 되어 피화된데서 그 이유 가있다.박습의유배에연 좌되어 박습의 아들 박의 손(朴義孫)은 남해에서, 박의보(朴義甫)는 광양에 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박습 이후 이렇다 할 주목되 는 사환자가 찾아지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 다. 박습의 후손들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1458년(세조 4) 4월 공식적으로 허용되면서 부터였 다.이때의조치는이후박세영(朴世榮)이사산감역 관 을 비 롯 해 전 주 판 관 과 풍 덕 과 초 계 의 군 수 , 돈 녕 부정등을지내고,박세무와박세옹(朴世 죕)이 문과 급제후관직생활을할수있었던계기가되었다.14 58년 이런 조치가 이루어지게 된 이유에 대해 실록 등에서명확하게설명하고있지않아자세한내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추정해보건대 박의손의 부인이 안동 권씨 권제(權 퇀의 딸이었다는 점이 주요한 배 경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주지하다시피 세 조의즉위에중요한공로를세우고공신으로책봉된 인물로 한명회(韓明澮)와 함께 권람(權擥), 신숙주 (申叔舟),정인지(鄭麟趾)등이있다. 이 가운데 권람은 한명회와 함께 세조가 정난(靖 難)하는데“제일앞장서서도와성취하게”한대표적 인인물로,정난공신1등과좌익공신1등에책록되었 다. 이 같은 세조 연간 권람의 정치적 위상으로 본다 면 충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을 것임은 쉽게 짐작된다. 권람은 박의손의 처가인 안동 권씨로, 아 버지가권제이므로,박의손의부인과는결국남매사 이가 되며, 박의손과 처남 매부 사이가 된다. 기록상 으로는 확인되지 않지만 1458년 박습의 후손들이 관 직에 나갈 수 있도록 한 조치는 당대 정치 실력자인 권람의지원이있었기에가능했을것으로추정된다. 박세무는 1487년(성종 18) 박중검의 둘째 아들로 태 어났다.어린 시절그가 살았던 곳은서울의돈의문(敦 義門) 밖 성 아래 월랑암촌(月朗巖村)이라고 한다. 현 재 월랑암촌이 정확하게 어느 지역인지 알 수 없다.다 만,박세무 등이 살던 집 뒤에 강사상(姜士尙,1519~158 1)의집이있었다는사실을통해서추정이가능하다.강 사상의 아들인 강인(姜絪)은 박세옹의 손녀사위이기 도 하다. 박세영·박세무·박세옹 등의 활동이나 교류가 가능했던사회적배경을보면다수의공신가문이포함 되었다.박세무와교류했던인물로충암(沖菴)김정(金 淨)과노천(老泉)김식(金湜)등이꼽힌다.김정과김식 은 조광조와 함께 ‘기묘사림’ 계열의 대표적인 인물로 분류되는 인물들이다. 김정(1486~1521)은 본관이 경주 로, 1507년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인 물로,1514년순창군수재직시중종즉위직후에폐비된 신씨(愼氏)복위를주장했던인물로잘알려져있다.김 식(1482~1520)은중종초조광조등의정치혁신안의일 환으로신설된현량과에급제한인물로,조광조등과함 께향약의시행이나위훈삭제등을주장한대표적인물 로알려져있다.이들이외에도박세무의사회적연망으 로 주목되는 것이 동방(同榜)이다. 동년(同年)이라고 하는동방의유대는단지같은시기과거에급제하는것 에 그치지 않는다.동방은 “형제의 의(義)를 맺고 천륜 에 비기려한다”는 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것이 조선 사회의 특성이므로 이들과의 친밀도는 일반적인 교류와는차이가있다.박세무와함께1531년(중종26) 식년시에급제한동방은모두26명이다. 박세무의동방중에는후일정승의자리에오른광주 이씨 이준경(李浚慶)을 비롯해 남양 홍씨(토홍) 홍섬 (洪暹),좌참찬을역임한양주조씨조사수(趙士秀),판 서를지낸밀양박씨박충원(朴忠元),풍천임씨임호신 (任虎臣)등이확인된다.또한정치적으로김안로와대 립하기도하였던나익이나당시에소윤계열로활동하 던소세양(蘇世讓)에대해비판적인입장을보이던이 여,이치등도확인된다.상당수가이시기전개되던척 신 정치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이던 인물들이다. 물론 현재로서는이들동방과박세무의정치적연계등이쉽 게확인되지않지만,동방이라는끈끈히관계는박세무 의활동에연망으로작용하였을것이다. 동방과함께박세무의사회적연망으로주목되는그 룹이동생박세옹과동갑계를형성했던인물들이다.모 두24명으로,갑계(甲契)를만들당시의정부우의정에 있던 상진이나 의정부 우참찬에 있던 김명윤, 의정부 좌찬성에있던민제인등이확인된다.김굉필의문인인 박소와 함께 송순,성수침 등도 주목된다.송순은 송흠 (宋欽)을 잇는 계열로,16세기 전반 호남 사림 내 주요 학맥을형성하며이후김인후(金麟厚)와기대승(奇大 升)등을배출한바있다.성수침은중종과명종연간에 일사(逸士)로추천되기도한인물이다.대개는사림세 력에동조하는인물들이라고판단된다. ▲관력과경세론(官歷과經世論) 1) 관력과 정치적 성향=어린 시절 “영민하고 총오 (聰悟)하였다”는 박세무는 형인 박세영에게 학문을 수학하며김정,김식등과교류하였다.형박세영은“나 면서부터 지덕이 뛰어났으며 학문에 뜻을 둘 나이에 스스로독서할줄알았다”고한다.이런점으로본다면 특별한 사승(師承) 관계를 찾기가 쉽지는 않다. 다만, 그가 제례를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랐다는 기록이 나 ‘기묘사림’을 비롯해 이언적(李彦迪) 등과 교류한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른바 ‘기묘사림’ 계열의 학문적 성향과유사하였을것이라는점은짐작된다. 박세무는1516년(중종11)사마시에입격한뒤에15 31년(중종26)에과거에급제하여사환을시작하였다. 박세무가사환을시작한시기는척신이주도하던정치 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기묘사화 이후 사화를 주도 하였던 남곤(南袞)과 심정(沈貞)등이 정국을 주도하 던상황에서일시적으로정계에서축출되었던김안로 (金安老)가 다시 등장하며 그를 중심으로정치세력이 재편되던상황이었다.김안로는둘째아들김희(金禧) 가 중종의 부마라는 배경을 권력을 농단하였다. 1527 년(중종22)이른바작서(灼鼠)의변을계기로다시정 계에진출한김안로는문정왕후와소윤(小尹)세력및 대윤(大尹)세력과정치적연대혹은견제를하면서권 력을 농단하였다.이즈음 박세무는 과거 급제 뒤에 예 문관소속의사관(史官)을거쳐전적(典籍)에있었다. 척신정치에대한폐해의심각성을정치현장에서목격 하면서비판의식을키웠을것으로판단된다. 이후박세무는1536년(중종31)예조의정6품인좌 랑을거쳐1537년(중종32)정5품인정랑을역임한뒤 함경도의 도사(都事)를 지냈다.이 시기 박세무가 지 방관직으로전보된이유는명확하지않다.다만전횡 을일삼던김안로세력에의한것이아닌가추정해볼 수있다.이러한추정이가능한것은1537년(중종32) 7월 문신의 인사를 관장하던 이조의 판서에 권예(權 纖 가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권예는 김안로 세력 으로분류되던인물로,김안로와함께경빈박씨의소 생인 복성군(福城君)의 사사에 관여한 바 있다.평소 정치성향으로보아김안로등이주도하던척신정치 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박세무는 이들에게 어찌보면 눈엣가시와같은존재였을것으로,이때의출보는 이 런이유에서이루어진것이아닐까추정된다. 박세무는 1538년(중종 33) 8월 사간헌 원납에 제수 되었다.당시 박세무가 속한사간원의 구성은,대사간 에 신광한(申光漢), 사간에 이청(李淸)등이 있었다. 신광한은 조광조 계열의 인물이며,이청 역시 조광조 와 붕비(朋比)를 체결했던 인물로 꼽힌다. 또한 동생 인 박세옹이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활동하고 있었 다.이시기는전횡을일삼던김안로와그추종세력이 축출된 직후였다.즉 1537년 10월 김안로가 사사되고, 추종자인 허항이 유배되는 등 김안로 세력이 대거 축 출되었다.그러면서 이를 바탕으로 같은 해 12월 좌의 정 윤은보 등의 주도하에 기묘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복권이추진되었다.‘기묘사림’중생존한자를비롯해 직첩이몰수된자,그리고파직된자를조사되었다.그 리고 이를 계기로 김안국이 서용되었고 양팽손,이약 빙, 김정국, 신광한, 이청 등에게 직첩이 환급되었다. 또한이미사망한최숙생이나이장곤,이자,김세필등 다수에게도 직첩이 환급되었다. 다만 핵심인물인 조 광조나 김정, 김식, 기준 등은 복권되지 않은 한계도 있었다. 이렇게 기묘사림이 복권되는 상황에서 기묘 사림들과 평소 교분 관계를 가진 박세무의 경우도 언 관직에제수될수있는상황이만들어졌던것이다. 헌납을 지낸 박세무는 이후 경기도의 마전군수에 제수되었다.당시대간에서마전군이조폐(凋弊)하다 고 하며 군수를 출척하고 대신 다른 인물로 보내자고 제안을하였다.이때파견된인물이박세무이다.박세 무는마전군수로부임하여“적게거두고균등하게부 과”함으로써 얼마 지나지 않아 유망민들이 돌아왔으 며,토지가 개간되었고 부고(府庫)가 찼다고 한다.마 전군수로서의인연으로인해박세무는1543년(중종3 8)6월고려의태조와혜종등7왕의위패를모신숭의 전(崇義殿)의 기문을 찬술하기도 하였다. 1544년(중 종 39) 내직으로 들어와 전적(典籍)과 참교(參校)를 거쳐 1545년(중종 40)사복시 부정을 지냈고,이후 안 변부사에 제수되었다. 안변부사에 제수되던 시기 중 앙권력은 이기(李潭 가주도하였는데,박세무는이기 와는 정치적으로 다른 입장에 있었다. 이로 인해 “번 번히 읍을 구하였다(輒求爲邑)”고 하며 이를 평생토 록자수(自守)했다고한다.박세무는안변부사재직시 지역에서발생한살인사건과관련해서파직되었다.그 리고는1548년에내자시정에제수되기도하였다. 2) 현실 인식과 경세론=박세무의 문집이 전하지 않고 그가 작성한 글도 많지 않아 그의 현실인식 전 모를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 가운데 마전군 수 재직시인 1544년(중종 39) 5월에 제출한 상소와 그의 저술이라고 알려진 동몽선습등을 통해서 일부 나마 그의 사고를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군수 재직 시에제출한상소는중종의구언교서에응한것이다. 즉 1544년(중종 39) 5월 11일 중종은 가뭄이 심해지 자 자신을 책망하면서 대소신료와 초야의 선비들에 게 구언하는 교서를 반포한 바 있다. 이를 계기로 홍 문관 부제학 등은 연명상소를 제출해 중종에게 변방 에대한경계강화를비롯해군주의마음가짐에대해 서 진달한 바 있다. 또한 성균관 생원 신백령(辛百 齡) 등도 연명으로 상소하여 기묘사화 때 피화된 조 광조의 복권을 요구하기도 하였다.박세무의 상소도 이러한상황의연장선상에서제출된것이었다. 박세무는 상소에서 먼저 군주의 사심(私心)을 경 계하였다. 박세무는 상소에서 “하늘은 사사로이 덮 어주는 일이 없고 땅은 사사로이 실어주는 일이 없 어,우로(雨露)로키워줌은사사로운은혜로하는것 이아니고상설(霜雪)로죽여버림도사사로운원한 으로하는것이아니며,일월(日月)도사사로이비춰 줌이 없고 한서(寒暑)도 사사로이 치우치게 함이 없 습니다. 때문에 높고 밝기도 하고 넓고 두텁기도 하 며 정대하기도 하고 광명하기도 하며 영원토록 쉬지 않는 것이 천지의 도(道)입니다.” 라고 하였다.천도 (天道)는 사사로움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내 용으로,여기서 천도는 필연적인 이치이며 인간으로 서 반드시 지켜야할 원리인 것이다. 더 이상의 지적 이 없어 구체화하기는 한계가 있으나, 박세무의 이 같은 논설은 중국 한나라 때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체계화된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의 연장선상이면 서도 당대 사림 세력이 강조하던 천관(天觀)과 맥락 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림 세력들은 천 (天)을인격적인존재로보기보다는‘천도(天道)’혹 은 ‘천리(天理)’라는 표현을 통해서 필연적인 이치 이며인간이지켜야할원리로파악하였다. 그리고인간의노력여하에따라천도혹은천리의 실현이가능하다고보았다.이러한사림세력의천관 은군주의역할이나위상과도관련되는데,군주의정 치적 지위와 권위는 부정하지 않지만 인격의 완성을 위한 수신(修身)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중종의 인 사를 전면적으로 비판하며 궁중이 엄숙하지 못하고 청탁이 만연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그러면서 궁인 과 연결된 족속들이 반드시 관직을 얻게 되어,“처음 에는 한 두 사람이 청하다가 서너 사람에 이르게 되 고 마침내 무려 10여 인에 이르게 되며” 매관(賣官) 의폐해가만연하게되었음을비판하였다. 이같은폐해는결국군주의사심으로인한때문이 었다. 동양사회에서 공(公)·사(私)에 대한 담론은 일찍부터 제기되던 것으로,초기에 공=국가나 국왕, 사=귀족이나 개인을 뜻하는 상황에서 송대 성리학 이 완성되는 단계에 이르면 윤리적 측면이 더욱 강 조되었다. “천리입공(天理立公) 인욕입사(人慾立 私)”라는 표현이 대표적으로, 공의 개념에 균형과 공정 등을, 사의 개념에 편파와 불공정 등을 포함하 게 되었다. 결국 박세무가 군주의 사심으로 인한 인 사의 실책을 거론한 것은 군주의 사적인 통치 행위 를 비판하고 견제하기 위한 것이고 이를 통해 덕치 (德治)를완성하려는것이다.이는동시에현실적으 로는 당시 권력의 핵심에서 정국을 주도하던 척신 (戚臣)세력에대한비판이기도하였다. 박세무는 천도 실현의 한 방안으로 조광조의 정치 적 복권을 주장하였다.박세무는 자신이 재직하고 있 는마전군의실정을부역의번다와부과와징수의과 중,생물진상의폐단등을지적하면서도이러한세세 한 것들로 군주의 성청(聖聽)을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다만 “저 황천 중에서 원통한 마음을 안고죽어서도눈을감지못하는”기묘사림의복권을 제기하였다.특히조광조의복권에집중되었다. 조광조에 있어서는 평생에 조금도 간사한 생각이 없었는데 죽어서는 황천에서 깊은 원통한 마음을 안고 있으면서, 추증하게 되는 명도 신원(伸 쪼)하 게하는명도받지못하고 있으니,또한족히원망과 한탄이 생기어 천지의 화기(和氣)가 상하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한가하신 틈에, 멀리 있는 신하의 말이지만 깊이 생각해 보시고서, 누구를 벼 슬시키는 것이나 누구를 사형하는 것이나 누구에게 상을 주는 것이나 누구를 벌하는 것과 모든 명령하 는 것을 한결 같이 지극히 공경하고 사가 없게 하여 천지의 도(道)를 본 받으소서 즉 조광조를 신원하 지 않 는 것 은 화 기 (和 氣 )를 손 상 하 는 것 이 요 , 결 국 에는 천도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라 하였다. 앞서 지 적 한 바 와 같 이 중 종 후 반 경 기 묘 사 화 로 피 화 된 사림들이일부정치적으로복권된바있다. 그러나 조광조 등 ‘기묘사림’을 대표하던 몇몇 인 물들은 박세무가 상소를 제출하던 시기까지도 아직 복권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조광조의 신원에 대한 주장은 이미 앞서 김안국 등이 제기한 바 있으나 실 현되지않았다.이는조광조스스로가대죄(大罪)를 범하였기때문이라는이유였다.이후박세무가상소 를 제출하던 시기를 즈음해서 조광조와 함께 김정, 김식, 기준 등의 신원 요구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특히조광조에대해논의가집중되기시작하였다. 박세무의 상소 또한 그 일환으로, 조광조의 정치 적 복권이 천도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이전 시기의 잘못된 역사를 청산하면서 사림 중심 으로 유신정치를 이루려는 사림 세력의 줄기찬 노 력이었다. 그러나 박세무를 비롯한 당시 사림들의 조광조 신원 요구는 사실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국왕 스스로가 기묘사화를 통해 정치적 반전을 꾀 하였고 당시에 상당수 정치 세력들이 이와 관련되 었기에이는쉽게받아들여질수는없는것이었다. 이상의 상소와 함께 박세무의 현실 인식 및 그 대 책을 이해하고자 할 때 중요한 저술이 븮동몽선습븯이 다.앞서언급한바와같이오늘날 븮동몽선습븯의저자 와관련하여논쟁이이어지고있다.박세무의저자설 은 이미 여러 선학들의 연구에서 거론된 바와 같이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송시열의 발문,그리고 승정 원일기기록등에서이미언급되는바이다. 그럼에도 박세무의 저자설을 부정하는 이유를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①윤인서의발문이 수록된 븮동몽 선습븯에서 민제인 찬이라고 한 점, ② 박세무가 저자 라는 사실을처음전하는중종실록을편찬할때 조카 인 박대립(朴大立)이 가담하였고 이후 후손들에 의 해서 지속적으로 주장되었다는 점,③박세무가 저술 한 판본이라고 불리던 장서각 소장본이 사실은 후대 소요당이라는쓰는다른인물이라는점등이다. 서지학에대해문외한인필자로서판본에대해이렇 다할논점을제기하기는어렵다.다만,②항목의경우 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조선왕조실 록의신뢰성에치명적인문제점이있다는지적으로들 린다. 조선왕조실록이 붕당 등장 이후 정파적 입장에 따라개수되거나수정된실록이편찬되기도하여편찬 자의 입장이 많이 반영된 점도 없지는 않다. 그렇다고 하여편찬에참여한특정인의개인적인견해가전혀걸 러지지 않고 등재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 후손들의 입 장이강하게영향을미쳤다면,후일인현왕후를배출하 는등17세기후반이후최고의문벌로성장한민제인의 후손들이아무런문제제기를하지않았던사실은어떻 게이해해야할까?특히영조대븮동몽선습븯이국가적으 로 간행이 진행되던 시기에 민제인의 후손인 민백상 (閔百祥)은 이조판서나 우의정 등에 재직하고 있었고 민백흥이승지등으로재직하고있던상황이었다. 한편 동몽선습의 저자와 관련해서 주목해야할 것 은윤인서의발문이수록된판본에서저자를언급하 며,“乃與同志共述一編”이라고서술한부분이다. 이서술은동몽선습이특정1인에의한저술이기보 다는 당대 사림들의 공편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지적 한 것이라 하겠다. 윤인서는 발문에서 이를 민제인이 주도적으로수행했음을강조하고있다.다만현재로서 그의 역할이나 간행 경위 등이 명확하지 않고 후대에 도 이와 관련된 논란이 전혀 제기되지 않았다는 점 등 으로미루어보아 븮중종실록븯이후각종기록에서박세 무가 주저자로 거론된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다만윤인서가지적한“동지공술”이라는점으로보아, 박세무가주도한상황에서당시사림들이함께참여하 여간행한것으로보아야하지않을까한다.그런점에 서동몽선습은박세무의인식은물론이고당시사림들 의인식을그대로반영한것이라고하겠다. 동몽선습은 전체 2600여자로 구성된 책인데, 크 게는 經·史로 구분하여, 경 부분에서는 오륜에 해 당되는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 신(朋友有信)을 설명하고있다. 사 부분에서는 중국사와 동국사로 나누어 사실과 사론등을수록하였다.이중오륜에대해설명하면서 아랫사람의 윗사람에 대한 도리뿐만 아니라 윗사람 이 행해야 하는 도덕규범 역시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는 특징을 보여준다. 부자유친에서 아버지는 자애를 아들은 효를 다해야한다고 하거나 군신유의에서 임 금은 임금의도리를,신하는신하의직책을다하여야 한다는지적,부부유별에서남편은남편의도리를,아 내는 아내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하거나 장유유서 에서 어른이 어른답게 어린이를 사랑하며 어린이가 어린이답게어른을공경해야한다는등이그것이다. 동몽선습의 이 같은 지적은 이해하기에 따라서는 당연한것으로치부해버릴수있다.그러나16세기중 반의역사상을고려한다면특별한의미로다가온다.1 6세기이후군신간의권력관계에서어느일방이절대 화되어 전제왕권적 또는 권신적으로 되는 경향을 지 양하고상대를인정하는군신권력관계가형성되었다. 그리고 이를 전제로 군주의 자질과 덕성 함양이 끊임 없이강조되었다.조광조등사림세력이군주에서심 학(心學)을 닦으라고 요청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동 몽선습에 관통하고 있는 상하 혹은 군신의 상호 윤리 는이런사림의정치적지향을담고있는것이었다. 이상에서중종대후반부터명종연간에활동하던박 세무의생애와경세론을살펴보았다.함양박씨박세무 의 선대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사환이 제한되었으 나,세조 연간 인척인 안동 권씨의 지원하에 관직 진출 이허용된것으로판단된다.이후박세영,박세무,박세 옹 등이 배출되었으며, 이들은 사림 세력들과 연망을 형성하면서활동하였다.이들과연망을이룬인물들은 척신정치에비판적인인사들이주류를이루었다. 박세무의관력은화려하지는않았다.그는문과진출 이후사관을거쳐헌납을비롯해군수와안변부사등을 역임하였다.그러나주목되는것은이런와중에서지방 관직으로 출보(黜輔)되거나 번번히 읍을 구하는 상황 이전개되었다.박세무는출사이후척신정치에비판적 인입장을견지했던것으로보이며,이런정치적성향으 로끊임없이당시정국을주도하던척신세력인김안로 세력이나이기등의견제를받았던것으로파악된다. 이상과 같은 박세무의 정치적 성향은 그의 현실인식 이나경세론에도그대로반영되었다.인사의실책을들 어군주의사적인통치행위를비판하면서천도의실현 을 위해 조광조의 정치적 복권을 추진하였다. 또한 븮동 몽선습븯에서는상하혹은군신의상호윤리를강조하였 다.이런사고방식이나경세론은비단박세무의독창적 인것은아니며,16세기사림들의일반적인경향이었다. 한편 박세무의 경세론을 살피는 과정에서 문헌에 상당히제한이있었음을피력하지않을수없다.단지 마전군수 때 제출한 상소와 그의 저술인 동몽선습을 통해서 살필 수 있을 뿐이다. 이 가운데 동몽선습과 관련해서는 박세무의 저자설에 이의를 제기하는 견 해가있다.다만다른주저자로말해지는민제인이동 몽선습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역할이나 간행 경위 등 이명확하지않고,17세기이후대표적인문벌인민제 인의 후손들이 박세무의 저자설에 어떠한 이의도 제 기하지 않고 있는 사실등으로미루어보아 현단계에 서는박세무가주저자라는점은인정된다.그리고븮동 몽선습븯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그와 연망을 형성했던 많은사림들이참여했다고보아야할것이다. 븮동몽선습븯의저자朴世茂의생애와경 세론(經世論) 선조 유지를찾아븣 가계와인적연망(家系와人的連網) 소요당 박세무 영정, 괴산 화 암서원소장 화암서원-충북괴산군칠성면송동리.1622년(광해군14)이황,이문건,노수신,김제갑의학문과 덕행을추모하기위해창건하 여위패를모셨고,그뒤에허후,전유형,박세무,이신의,박지겸,허조,유근을추가배향하였다. 동몽선습기념비-괴산읍충민로검승1길18-9.괴산군에서는 2004년소요당공의손자애한정박지겸의정자입구에동몽선 습기념비를세워현장학습공간으로이용하고있다. 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