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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6월30일 목요일 4 (제114호) 관향조 종친회 고흥 문중은 조상의 위업을 숭상하는 숭고한 정신과 경로효 친의 바탕위에 온 문중의 화목 단합을 이루고 있어 지역의 타 문중에서도화제의종중으로유명세를타고있다. 입향 이후 15대에 걸쳐 많은 후손들은 국가와 민족 그리고 사회와 가문종사에 힘써왔으며, 후손 병종(柄淙)은 현 3선 고 흥군 민선군수로 이번 청년회 선조유적지 탐방행사에 큰 관심 과 함 께 적 극 후 원 을 아 끼 지 않 는 다 . 전남 고흥군 두원면 대산리와 와룡리,학곡리는 밀양박씨 규 정공후 참판공 문중의 집성촌이다. 많을 때는 타성 없이 100여 호의 큰 마을이었으나 이농현상으로 각 40여 가구 중 타성은 몇 집 되지 않는다. 입향조 묘소와 승효재(承孝齋)를 사이에 두고 오른쪽 대산리는 휘 맹동(孟同)의 후손이,왼쪽 와룡리와 숭양사가 자리한 두곡리는 휘 중동(仲同)의 후손들이 집성촌 을 이루며 496년을 이어왔다. 고흥 문중의 입향은 참판공의 현손으로 칠원현감을 역임한 휘 맹동으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두 동생(중동,계동)과 함께 고흥으로 은둔하기에 이른다.그 시기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15 19년으로추정된다. 참판공은 규정공(휘 현)의 현손으로 호조참판을 지낸 휘 눌 생(訥生)으로 자는 돈지(惇之) 호는 운수(雲?)이다. 호조전서 (戶曹典書) 휘 침의 3남으로 고려 공민왕 갑인년(1374)에 출 생하여 15세부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受 學) 하였으며 1409년(조선 태종9년) 36세에 문과에 급제 훈련 원판관(訓練院判官)을 시작으로 두루 요직을 거쳐 세종 때에 훈련원지사(訓練院知事)와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1449년(세종 31년)8월 7일에 하세하니 향년 76세였다.배위는 중추부사(中樞府事)허해의따님이다.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 號)는 충간(忠簡)으로 고흥(高興) 숭양사(崇陽祠) 경산(慶 山) 율산서원(栗山書院) 장흥(長興) 세덕사(世德祠)에 배향 (配享)되었다. 아드님인 충양공(忠 翔公)의 휘는 경신(諱 景愼)으로 자는 자흠(子欽)이고 호는 둔수(遯 쑴)로 배위는 정부인 경주이씨 이다. 1414년(태종14)에 출생하여 1438년(세종20) 25세에 등 제(登第), 경주판관(慶州判官), 1453년(단종) 훈련원사직(訓 練院司直)으로 재직 중 세조의 왕위찬탈에 종형(從兄) 청재공 (淸齋公諱 審問)과 함께 단종(端 宗)복위(復位)에 뜻을 같이 하여 곧은 마음과 숨은 절개는 생육신 과 비유되었다. 묘소는 全州 東十 二里 소양산 (韶陽山) 표동(瓢 洞) 계좌(癸坐)이나 실전(失傳) 선고묘하(先考墓下) 설단(設檀) 하였다. 철종(哲宗), 병진(丙辰) 1866에 비로서 호조판서(戶曹判 書)를 증직을 받고 충양(忠 翔)의 시호(諡號)를받았다. 고흥종중의 입향조(휘 孟同)의 고조와증조가된다. 입향조 휘 맹동의 자(字)는 윤 길(允吉), 호(號)는 조수(釣 쑴)이다. 문과로 벼슬이 찬성(贊 成 ) 에 오 른 휘 연 ( 읨)의 아들로 1484년(성종15, 甲辰)에 태어 났는데 타고난 바탕이 특이함이 있어 재주와 성정이 민첩하고, 넓게 여러 가지 경사를 많이 읽고 공부하여 문장이 뛰어나 150 7년(중종2) 생원시와 진사시에 올랐다. 그리고 1511년(중종6. 辛未)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1513년 직장이 되고,1514년(甲 戌)칠원현감에제수되었다. 동생 중동(號 蘿菴)은 1498년 진사시에 오르고, 1519년(己 卯)에 문과에 올라 형제분이 넓은 세상에서 여유로움을 찾을 수 있음에도 이를 물리치고 형의 제의(고흥 은둔)에 자취를 함 께했다. 입향 형제분들은 덕과 선행으로 일관하여 형 휘 맹동은 효종 조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동생 휘 중동은 병 조참의에증직되었다. 라암공(휘 중동)의 손자 은춘(殷春, 호 東溪)은 1544년생으 로 체격이 크고 용모가 단장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궁마 익히기 와 병서 읽기를 좋아 하였으며 학문을 할 때는 밤새는 줄 몰랐 다, 1576년 33세에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사재감 주부, 첨정감 을 역임하고, 임진왜란에 첨사 김완과 함께 같이 거의하고 이 충무공 진영에 달려가 합류했다. 충무공은 공의 지략과 절의 가 뛰어남을 크게 기뻐하며 함께 계략을 논의 하였으며, 1592 년 5월4일 첫 옥포해전 부터 1598년 10월 왜교성 전투까지 수 많은전공을세웠다. 특히 당항포해전에서는 피령전(皮翎箭)으로 붉은 갑옷을 입은 적장을 쏘아 죽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하고, 적선(敵 船)을 바다로 유인하여 30여척을 가덕도에서 침몰시켜 크게 이겨 이 소식을 들은 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공(公)을 조방장에 임명하였다. 또 수사 이억기 부사 진무성 첨정 신인수 등과 합 세 독전하여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편안케 하였으며, 1593년 진주성이 위급하다는 소식에 이순신 장군의 탄식함을 듣고 단 신으로 적진을 뚫고 성안으로 들어가 창의사 김천일 복수장 고 종후 병사 황진 현감 송제 등 제장과 방어지책을 논의하고 돌 아와적정을보고하는등맹장으로써이름을떨쳤다, 1593년 7월 14일 한산도로 군영을 옮길 때 따라가서 민,병 합 동둔전(屯田)을관리하여군량의자급에기여하였다. 1597년 2월 26일 권율 도원수 와 원균 신임 통제사가 한산도 에 오고 의금부 도사가충무공을 체포하여 갈 때, 공(公)은 원 균이 통제사를 속이고 모함 하였다고 분노하여 원균을 죽이려 고 하자,이순신 장군은 이를 만류 하였다,인하여 국문하고 심 문하였으나은혜(용서)를받고돌아왔다, 1597년 9월 16일 벽파진대첩(명량대첩)때는 실전 경험이 있 는 장졸 160여명의 수군 재건 노력 및 충무공의 지략과 용맹으 로 크게 이기니 해남현감 유형은 공(公)의 전공을 통제사에게 최고라 추대하였으며, 조정에서 듣고 인동부사에 특별히 제수 하였으나 나가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흉적들을 모두 섬멸하지 못하여 종묘사직이 위급하고 국가가 위태로운데 어찌 가히 휴 양하고 자적하리요”하고 계속 종군하였다. 1598년 9월 20일 ~ 10월 4일에 조(朝), 명(明) 연합군의 왜교성 합동작전에서 명 나라 육군의 배신으로 조선수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이때 그도 선두에 서서 싸움을 독려하고 격려하며 용감히 싸우다가 홀연히 적탄이 날아와 가슴에 맞아 절명에 이르게 되어서도 북 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말하기를 “죽음을 당하게 되나 나는 신 이 되어 적을 섬멸하겠습니다.”하고 운명하였다. 난(亂)이 평 정된 후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선무훈에 녹훈되었으며, 1849년 봉암사에 배향 되었는데 1869년(고종5년)에 국령으로 철폐 되 어 향사가 끊겼다가, 1935년 숭양사가 창건 되어 파조 규정공 을 주벽으로, 전서공, 현조 참판공 다음으로 아들 응수와 함께 배향되었다. 휘 은춘의 아들 응수(應秀)의 字는 한서(漢瑞), 호는 매헌 (梅軒)으로 1566년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강개하고 효성이 지 극하였다, 1588(무자)년 23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군관이었는 데 1592년 임진왜란 때 임금이 서쪽으로 파천한다는 말을 듣고 즉일로 급히 가서 대가(大駕)를 호종하였고 행재소에서 물샐 틈 없는 경계 등 모든 군사 일을 성심을 다 하니. 이를 본 윤두 수,이항복 두 재상들이 참 의사라고 칭찬하며 중부장(中部將) 에 추천하고 환궁 후에 종5품 훈련원 판관(判官)에 배수 되었 다. 1598년(戊戌)에는 부산 첨사로 진양(진주,양산) 지역에 배 치 되었는데 아버지가 전사했다는 비보를 듣고 복수를 결심하 고 왕 에 게 아 뢰 니 선 조 는 그 뜻 을 아 름 답 게 여 겨 말 과 화 살 3 0 0 개를하사하였다. 노량진에 이르러 먼저 아버지의 묘에 곡하고 이순신 장군을 만나 본 후 노량해전에서 무수히 많은 적을 살상하고, 정기수 이완 등과 함께 합세하여 싸우다가 적탄에 맞아 전사 하였는데 두 눈을 부릅뜨고 쓸어 지지 않고 서있었다, 이 소식을 통제사 가 듣 고 제 문 을 지 어 제 사 를 지 내 자 스 스 로 쓸 어 지 니 모 든 사 람들이 기이하다 하였으며,이 날이 11월 18일 이었다,이때 공 (公)의 나이 33세였고, 부자가 함께 임란에서 유명을 달리했 다. 난이 평정된 후 선무훈에 녹훈되었고, 병조참의에 증직되 었으며,숭양사에배향되었다 그 아들 경추(慶秋)는 호가 사고당(四固堂)인데 1584년생 으로 체격이 크고 뜻과 기개가 탁월하였다,1614 광해 갑인년 3 1세에 충량과에 급제하여 북청판관, 사헌부장령을 역임하고 1 636년 병자호란 때는 안변부사로 있으면서 무과급제한 군관인 경상(慶祥) 경운(慶云) 두 동생들과 의병 수백을 모아 근왕병 을 이끌고 7일 밤 낯으로 내려오던 중 화의가 성립되었다는 소 식을 듣고 서로 비통해 하다 나라가 이런 치욕을 당하였는데 무슨 면목으로 관직에 있겠는가 하고 병력 해산과 관직을 사의 하고 귀향 후 이듬해 54세로 졸 하였다. 3대에 걸쳐 충의가 특 출하다. 고흥 문중의 후손들은 이 밖에도 많은 충신열사가 배출되었 으며, 입향조 맹동의 5대손 운벽(運碧)은 효행으로 통정대부, 운극(運極)은 종제 영발(英發)과 우산문인인데 병자호란에 창의하여 우산막하에 달려가 여산에 이르렀을 때 화친이 되었 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돌아와 종신토록 두문불출하였 으며예조참판에증직되었다. 입향조 묘소 아래 승효재 옆에는 효자 종호(宗豪), 갑식(甲 植), 효열녀 김씨, 효부 정씨의 효행을 기록한 비석 4개가 있어 후손들의 성품을 짐작해볼만하다. 고흥 문중의 주요 유적은 입 향조 묘소를 비롯 승효재,신도비,규정공을 비롯한 5位 선조님 을배향한숭양사,임란의병장박은춘장군의신도비등이있다. 소재지 :전남 고흥군 두원면 학곡리(두곡마을)925-2번지 숭양사를 창건하기 전 헌종 기유(己酉, 1849년)년에 흥양현 (현 고흥군)과역면 가산리 의 봉암사(鳳巖祠)에 규정공(휘 현), 동계공(휘 은춘), 매헌공(휘 응수) 3위가 옛 흥양 출신 충 신 열사들과 함께 배향 되었는데,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어 향사가 끊겼다가 1935년(乙亥) 후손들의 종의로 현 위치에 사당 3칸, 강당(敬慕齋) 4칸, 신문(忠義門), 외삼문(興 慶問), 고직사 3칸을 창건, 숭양사(崇陽祠)라 이름하고, 규정 공(휘 현)을 주벽으로 전서공(휘 침) 참판공(휘 눌생) 동계공 (휘 은춘)매헌공(휘 응수)을 배향 하여,매년 춘 추로 정일(丁 日)에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향사를 받들어오다, 60여년의 풍 상으로 사우가 퇴락하여 1997년에 지방정부 지원금과 후손들 의 성금으로 대지를 매입 확장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重 建)하여매년음력3월1일에향사를올리고있다, 숭양사의 숭양(崇陽)이란복양(復陽)또는광복(光復)과같 이 사당을 다시 빛나고 높게 회복하였다는 뜻으로 풀이 할 수 있다. 한센병(나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고흥반도의 끝자락인 녹동항에서 1㎞가 채 안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 하다고하여소록도라고불리운다. 과거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섬이지만 현재는 700여명의 환자들이 애환을 딛고 사랑과 희망을 가꾸고 있다. 섬의 면적은 여의도의 1.5배인 15만평 정도에 불과하지만 깨끗 한 자연환경과 해안절경,역사적 기념물 등으로 인해 고흥군의 새로운관광명소로떠오르고있다. 고흥반도를 가로질러 녹동항 부둣가에 서면 600m전방에 작 은 사슴처럼 아름다운 섬 소록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국도 27 호선을 이용하여 소록대교를 거쳐 소록도 주차장까지 이동 가 능하며소록도주차장에서부터는도보관람만가능하다. 국립소록도병원의 역사는 1916년 설립된 소록도 자혜의원 에서 시작되는데, 이 병원은 당시 조선 내의 유일한 한센병 전 문의원이었다. 이곳의 중앙공원은 1936년 12월부터 3년 4개월 동안 연 인원 6만여명의 환자들이 강제 동원되어 6천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지금도 공원 안에 들어서면 환자들이 직접 가꾸어 놓은 갖가 지 모양의 나무들과 함께 전체적으로 잘 정돈된 빼어난 조경이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그리고 공원 곳곳에는 환자들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기념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공원 입구에 는 일제 때의 원장이 이곳에 수용된 한센병 환자들을 불법 감 금하고 출감하는 날에는 예외 없이 강제로 정관수술을 시행했 던감금실과검시실이있다. 이 검시실 앞에는 25세 젊은 나이에 강제로 정관수술을 받은 환자의 애절한 시가 남아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또한 소록도병원의 역사와 환자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갖가 지 자료가 전시된 생활자료관에서는 한센병에 대한 올바른 이 해와함께인간의존엄성을다시한번생각게한다. 이밖에도 공원내에는 한센병환자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 시비, 일본인이면서 조선 환자들을 가족처럼 아껴주며 헌신적 으로 보살핌으로써 소록도의 슈바이처라 일컬어지는 하나이 젠키치 원장의 창덕비,그리고 “한센병은 낫는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구라탑 등 환자들의 애환과 박애정신을 엿볼 수 있는기념물들이세워져있다. 섬내에는 울창한 송림과 백사장이 잘 어우러져 있는 소록도 해수욕장이 있어 병원 방문과 연계하여 하루를 보내기에 적합 하다. 주의할 점은 섬 내에서는 숙박이 금지 돼 있어 오후 6시 이전에 반드시 육지로 돌아와야 한다.소록도 인근에는 둘러볼 만한 관광지가 많이 있어 조용하고 시원한 여름휴가를 보내기 에좋다. 녹동항에서 운항되는 유람선을 이용하면 추위가 느껴질 정 도로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활개바위,거북바위 등 갖가지 기묘한 바위들과 함께 다도해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녹 동에서 승용차로 5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 팔영산 자연휴양림 을 찾으면 산과 계곡, 일출의 장관을 즐길 수 있고,숙박시설로 휴양림내산막시설을이용할수도있다. 돌아오는 길에 고흥의 특산물인 유자나 마늘, 김 등을 구입 하는것도좋다. 사슴처럼 맑은 영혼 을 가 진 사 람 들 이 모 여산다고 이야기되는 곳! 소록도는 고흥반도 끝자락인 녹동항에서 1 ㎞가 채 안되는 곳에 위 치하고 있으며, 섬의 모 양이 어린 사슴과 닮았 다고 하여 소록도라 불 리운다. 섬의 면적은 15만평 정도로 작지만 깨끗한 자연 환경과 해안 절경, 역사적 기념물 등으로 인해 고흥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자료제공고흥군청 밀성박씨전국청년회븣미리가보는 선조유적지 밀양박씨규정공후 참판공 고흥문 중 뱚▶참판공파고흥입향 고흥입향조(휘맹동)의묘소(○), 수종갱신을위해지난 봄 벌목작업을하 였다.(전남고흥군두원면대산리) 박은춘장군신도비 고흥군두원면학곡리 뱚▶소록도[小鹿島] 숭양사전경 ①사당숭양사 ②내삼문 충의문 ③강당경모재 ④외삼문흥경문 뱚▶숭양사(崇陽祠) 소록도,멀리보이는곳이녹동항이다. 뱚▶아픔을딛고도약하는섬소록도 븮한센병은 낫는다븯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구라탑,뒷면에는62년워크캠프참 가자들의명단이 적혀 있으며, 구라탑이 란‘나병을구하는탑’이라는뜻이다 밀성(밀양)박씨 전국청년회(회장 부돌)는 지난 2003년 제1회 선조유적지 탐방행사를 시작으로 매년 연례행사 를 통해 회원 상호간 친목을 도모하고 훌륭한 선조님의 유지를계승발전시켜자기개발을이루고있다. 지난5월과6월 중순회장단회의를통해2016년선조유 적지 탐방행사를 7월 2일 전남 고흥군 두원면의규정공 后참판공파고흥문중입향조묘소와규정공(휘현)을비 롯한 선조님의 위패가 배향된 숭양사를 찾아 참배하고 고흥 녹동의회센타에서 준비된 점심 후 인근의소록도 를 방문키로 정하고 사전답사를 통해 당일 행사의만전 을 기하고 있어 이번호에서는 청년회 탐방코스를 미리 가본다. 특 히 이 번 행 사 는 여성 회 가 함 께 해 더 의미 있 는 행 사 가 될것같다. 박부돌 청년회장 박재숙여성회장 밀성박씨전국청년회븡 여성회2016선조 유적지순례참가안내 밀성박씨전국청년회에서개최하는선조유적지순례행 사는충효사상을함양하고,회원상호간서로의마음을 열어 친목을 다지는 자리를 마련하여 몸으로 체험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인식하며숭조를 몸으로 실 천하고, 청년회활성화를기하는데목적이있습니다. 이에 아래와 같이 선조유적지 순례를 실시하고자 하오 니전국밀성대군후예청년들의적극동참을바랍니다. 내용 1.일 시:2016년7월2일(토요일)오전08시출발(밀성재) 원거리에계신회원은밀성재에전일도착숙박가능함. 2.장 소 :전남 고흥군숭양사외 3.참석대상:밀성대군후예청년(부부동반환영) 4.참가회비:50,000원 농협351-0789-8748-23 예금주 밀성박씨청년회 5. 문 의:055-354-4421밀성박씨전국청년회 ※고흥현지로직접찾아오실분은당일아침10시30분까지고흥군두원면 대산리입구로오시면됩니다.문의010-3268-7300청년회조직담당부회장 密城朴氏全國靑年會長 朴扶乭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