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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6월30일 목요일 12 (제114호) 기획 조선시대의폭군(暴君)하면연산군(燕山君)과광해군(光海君)을떠올리게된다.이때의관리를보면자신의영 달과안위만을위해아첨하고패거리를만들어 임금의판단을흐리게하면서연산군과광해군은 더포악한임금으로포장이된다.관포박홍미선생은조선 중기대표적인문신으로문장이뛰어나조선은 물론중국에까지도문명을크게떨쳤으며광해군의폭정을지적한대표적인관리로유명하다.그리고이이첨 이군중의분노를잠재우고자기의사욕을이루 려고기획한후진양성을위해추천한명망있는학자32명중수위(首位)에이름을올리지만선생은아랑곳하지 않고오직백성을위한정치실현에최선을 다 하고자하였다.선생은창원부사시절청렴한관리로이름을높였으며,병자호란에화의가이루어졌다는소식 에통곡하다가목이휘고쓰러진지한참만에야 깨어난후서산동암에은거하여세상을마쳤다.택당(澤堂)이식(李植),기암(畸庵)정홍명(鄭弘溟)등과더불어 당대에이름높았던문장가와교류하였던선 생의훌륭한시문(詩文)은6대손동규(東奎)공(公)이편집한관포집이전해지고있다.특히선생의시문(詩文 )중의청강부(淸江賦)는명나라사신과함께주 고받으며읊은(수창,酬唱)것으로,중국의명시(名詩)적벽부(赤壁賦)와도비길만하다하며,경주부윤(慶州府 尹)으로있을 때 쓴 회 고 시 (懷 古 詩 ) 는 여지기승 (輿地氣勝)에도수록되어있다. 관포 박홍미 선생의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경립(敬立),자는 직재(直哉)·군언(君彦),호는 관 포(灌圃), 현룡(顯龍)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윤환(尹 )의 딸이다. 월성박씨는 신라 제54대 경명왕의 제8왕자인 월성대군 박언의(朴彦儀)를 월성박씨(月城朴氏)의 분관조로 한다. 이후 고관 대작을 세습하여 오다가 고려시대에 이르러 七대 시중(侍中)이 있었으며 여러 대를 전해오다가 휘 (諱) 구(龜)는(월성대군 13世)는 중군사정븡부령 (中軍司正 副令)을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자 벼슬 을 버리고 두문동에 은거하였다가 나중에 인천에 있는 산중에 은거하고 있어 이 산을 장아산(藏我 山)이라 불려졌다. 그 후 조선 태종이 여러 차례에 걸쳐 벼슬을 하사하며 불렀으나 끝까지 절의(節 義)를 지켰고, 망경대(望京臺)에 올라 망국 회한을 통곡으로 달래며, 누차 불렀지만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장아산에서 일생을 마쳤으니 선생의 六대조요 五대조는 휘 간(幹)이니 처음 으로조선에서벼슬하여대사 성(大司成)을 지냈으며 고조 (高祖) 휘 휘지(徽之)는 대사 헌(大司憲)을 지내어 이조참 판과 홍문관·예문관 제학(提 學)에 추층되고 당세에 명성 을 떨쳤다. 증조 휘 신겸(信 謙)은좌통례(左通禮)를지내 고 조 부 휘 사 공 (士恭)은 임 진 왜란 때 추천으로 임치(臨淄) 절제사에 제수되어 좌승지 (左承旨)에추증되고출계(出 系)하여 중부(仲父) 관찰사 호당(湖堂:독서당) 이조참판 송계공(松溪公) 호겸(好謙) 의 후사가 되었다. 선고 휘 현 룡(顯龍)은 참봉을 지내고 호 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선비 는 해평윤씨 현감 헌( ) 의 따님인데 융경(隆慶) 신미년(1571년) 10월 27일에 인천성서리(城西里)자택에서공을낳았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뛰어난 자질이 있어서 겨우 열 살이 되었을 때 꿈에 단전(丹篆,붉은 전서 글씨븡 예스러운 글씨)을 삼키고 문장의 재화가 날로 새로 워 졌 다 . 약 관 (弱 冠 )의 나 이 때 부 터 택 당 (澤 堂 )이 식(李植)과 기옹(畸翁) 정홍명(鄭弘溟), 석주(石 洲) 권필(權 ), 명고(鳴皐) 임전(任 킵) 등으로 더 불어 선조(宣祖) 조정에서 명성이 가즈런하였다. 계묘년(一六O三) 사마시(司馬試) 양과에 합격하 고 1605년(乙巳)에 증광시(增廣試)의 문과에 오르 고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었다. 정미년 ((一六O七)에 모친 윤(尹)부인의 상을 당했다. 일찍 부친을 잃은 데다가 또 다시 모친을 잃고 슬 퍼하며 몸이 훼손되어 예제보다 지나치어 보전하 지 못 할 것과 같았다. 복을 마치고 전적(田籍)에 승진되었다. 신해년(一六一O)년 병조좌랑에 임명 되고 갑인년에 대동찰방(大同察訪)에 제수 되었는 데도신의계달로인해삼년간을맡게되었다.1618 (戊午)년에 연이어 정언(正言)·지평(持平)에 제 수되고 1619(己未)년에 궁궐신축에 공로가 있어 병조좌랑이되고곧바로병조정랑에 승진되었다.1 621(辛酉)년에 영주(瀛州) 학사(學士)에 선발되 고 수찬·교리(校理)·응교(應敎)를 지내다가 다시 정언(正言)·헌납(獻納)에제수되었다. 1622(壬戌)년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중 국(명나라)으로 사신을 떠나게 되는데 사신을 따 라갈 종사관으로 선생이 선발되어 함께 중국을 다 녀온다.이때선생은중국에서그의탁월한문장을 조선의 대표적 문장가인 월사 이정구와 함께 유감 없이떨쳤다.조서를받고사신이돌아올때에수행 하여안주(安州)에이르렀는데 때는가을의7월 16 일 이었다. 여러 공(公)들과 함께 청천강(淸川江) 에 배를 띄우고 노닐면서 청강부(淸江賦)를 지었 는데 이를 읽어본 사람들은 소식(蘇軾)의 적벽부 (赤壁賦)와 동등하다고 칭송하였다.조사(詔使)가 장 차 돌 아 가 려 고 할 때 공 이 이 별 시 를 주 니 이 별 하 는사신이크게감탄하고칭찬하며말했다. 『문장의 뜻이 모두 표현 되었오』또 말했다. 『내 동방에있을때일이모두여기에있다고』했다. 명 내 라 황 제 신 종 (神宗)은 청 강 부 (淸江賦 )를 보 고적벽부보다오히려낫다는비답을내리기도하였 다. 그 후 선생이 돌아와서 여러 시정(寺正)에 제수 되기를혹3~4차례에이르렀다.당시광해군이자기 모친 김씨를 추숭하려 하여 장차 중국 조정에 책봉 의 명 을 요 청 하 려 는 데 누 가 그 불 가 함 을 말 하 려 한 즉 칼과 톱을 가지고 간함을 거절하므로 감히 입을 열지못하였으나선생이상소하여못하도록말했다. 『나라에는 두 임금이 없고 집에는 두 적처(嫡妻) 가없는것이큰도리와큰법도로서지극히엄중하 고 지극히 명백하기 때문에 노(魯)나라 은공(隱 公)이 둘째 아들에게 희공(僖公)이 성풍(成風)에 게 대우한 것을 춘추에서 깊이 잘못된 것으로 여겼 는데 이는 실로 선대 유림의 정론으로서 노나라의 두 임금이 천자에게 책봉의 명령을 청하였다는 말 은 들어보지 못하였으니 어찌 예를 지키고 의를 두 려워서 감히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이른바 사친(私親)이라 국내에서 칭한 것은 국경 밖으로나가서는안될것을여기서도볼수가있을 것입니다. 이제 세상의 선비가 조금이라도 책을 읽 을 줄 알게 되면 이 일의 뜻을 강명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중국 조정에서 정도를 지키 고 예의를 아는 군자들이 예경을 인용하여 엄중한 말로 배척한다면 손해가 적지 않아 장차 가히 따르 지못할후회가있을것입니다.』 이때 광해군은 곧은 말 듣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사헌부에 있는 관리들은 머뭇대며 관망만 하고 있 다가조정에서큰논의를만나게되면먼저말을꺼 내기를 주저하였는데 선생이 문득 사림들을 주창 하여정도로돌아서게했다. 얼마 후 적신 이이첨(李爾瞻)등이 사형수들을 선동하여 큰 옥사를 일으키고 광해군을 인도하여 화란을 선동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며 국구(國舅:金悌男延興府院君)의 三족을 망치며 선 대왕조의노신들을모두죽이고대비까지서궁(西 宮)에 가두어 버렸다. 이에 선생은 드디어 벼슬 할 뜻이 없어 인천의 선영 아래로 물러와 살면서 호를 관포(灌圃)라하여자신의뜻을드러냈었다. 1623(癸亥)년에 반정(反正)이 되자 포저(浦渚) 조익(趙翼)이 선생의 늙고 포부를 펴지 못함을 애석 하게 여겨 계곡(谿谷) 장유(張維)에게 힘써 천거하 니 당시 계곡은 전형(인사)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선생은 장악원(掌樂院) 첨정(僉正)·군자감정(軍資 監正)에제수되었고다시수찬(修撰)으로옮겼다가 교남(嶠南:영남) 어사가 되었다. 또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정삼품 당상관)로 소환하여 통정대 부(通情大夫)의 직계에 승진하고 동부승지(同副承 旨)로옮겨서열이좌승지(左承旨)에이르렀다. 1624(甲子)년에 병으로 외관(外棺)에 나가길 청 하여 창원(昌原) 부사(府使)에 제수 되었다. 성심 으로 주민들을 다스리고 청렴으로 자신을 바루어 주민들은 편안하고 관리들은 복종하였다. 어떤 종 이 있 어 사 사 로 이 철 기 를 만 든 뒤 에 자 신 써 줄 것 을기대려했다.공이이를알고즉시명령하여돌려 주게 하니 이로부터 고을의 안팎이 더욱 엄숙해졌 다.이에치적의명성이한고을에서떨쳐지고도신 의 계달과 어사의 포상이 이어서 올라오자 말을 내 려주어 권장하였으며 또한 겉옷과 속옷을 하사한 것도모두여섯차례나되었다. 【인조실록 11권, 인조 4년 2월 6일 기묘 1번째기 사..... 1626년 명 천계(天啓) 6년, 경상도 관찰사 원 탁이 홍득일·박홍미·신경류 등에게 포상할 것을 건의하다. 경상도 관찰사 원탁(元鐸)이, 동래 부사 (東萊府使)홍득일(洪得一),창원 부사(昌原府使) 박홍미(朴弘美), 부산 첨사(釜山僉使) 신경류(申 景柳)등이 청근(淸謹)하고 잘 다스린 정상을 계문 (啓聞)하고 포상할 것을 청하니, 각각 표리(表裏) 1습(襲)을하사하라고명하였다. 인조실록 18권, 인조 6년 1월 25일 정해 5번째기 사...... 1628년 명 천계(天啓)8년,창원 부사 박홍미 를 치적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가자하다,창원 부사 박홍미(朴弘美)는 치적이 제일이라는 것으로 상이 가자(加資)하라고명하였다.】 어사가복명하자임금이말했다. 『창원부사박아무개는치적이가장많아여러차 례 서계(書啓)가 올라왔으니 이름을 낚으므로 즐거 움을삼는자인가?참으로잘다스려나라일을위해 서 마음을 다한 것인가』어사가 아뢰었다. 『신은 다 만 잘 다 스 려 지 는 줄 만 알 았 을 뿐 이 고 그 이 외 에 는 알지 못하겠으나 정치의 공적이 이와 같으니 어찌 나라일에마음을다하지않음이있겠나이까?』 임금이각관서에명하여창원의상납한장부를고 찰한 뒤에 거짓이 아님을 비로서 확신 하였다.그 후 관직의 임기가 만료되어 돌아가게 되니 고을 주민들 이 공을 1년만 차용해 달라고 했다.외직을 맡은 제 6 년간 인데 인근 고을의 오랜 송사가 해결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모두 공에게로 돌렸는데 공이 판결하기 를귀신같이하고역시말을후퇴시킨적이없었다. 창원부사 때(1625년) 선생의 문명은 이웃 통영 에까지 알려져 두룡포기사비(頭龍浦記事碑)를 찬 (撰)하게 된다. 1628(戊辰)년에 특별히 가선대부 (嘉善大夫,종2품)에승진되었고기사년에도도로 승지(承旨)에 제수되었다. 임금이 말씀했다. 『경 (卿)이 창원에 있을 때 무슨 덕의 정치가 있었기에 이러한명예를얻었는가?』공이대답했다『그고을 의 풍속이 좋아서 였을 것입니다.』 이를 들은 사람 들이 선생을 칭송하면서 유곤(劉昆)이 우연히 대 답했던것보다더낫다고하였다. 1630년(庚午)년에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 고, 1632년에 다시 은대(銀臺:承政院)에 들어가서 판결사가 되었으며 계유년에 삼척(三陟)부사에 제 수되고 갑술년(一六三四)에 판결사가 되었다가 도 승지(都承旨)와 홍문관의 부제학(副提學)에 전직 되었다. 1635(乙亥)년에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가 외관(外棺)으로 나아가 양양(襄陽) 부사가 되 어 응지소(應旨疏)를 올렸으니 「소(疎)이 이르기 를 「전하(殿下)께서 상성인(上聖人)의 자품으로 왕위에 오르신지가 14년이 되어 정신을 가다듬고 근심걱정도 간절하지 아님은 아니었으나 국가를 다스리는 효과는 날로 요원하고 위망의 현상이 날 로 노출됨은 이게 무슨 까닭입니까? 기강이 확립 하지 못하고 민간이 의지가 정돈하지 못한데에 말 미암이오니엎드려원하옵건데전하께서는여기에 뜻을 두시어 유신의 정치가 확립되기를 희망하게 된즉국가의다행이극심하다하겠습니다.」 민간을 다스리고 군사를 다스리며 수리(水利) 농사의 서정에 있어서도 모두 들어서 말끔하시지 아니함이 없으므로 당시에 사람들이 봉새가 산의 동쪽에서 운다는((鳳鳴朝陽, 천하가 태평할 좋은 조짐을 이르는 말) 것으로 서로들 비유하였다. 특 히양양부사를제수받고길을떠나강원도홍천민 가에서 지은 몽포설(夢飽說)은 지금 우리가 사는 현세대지혜를얻을수있는유명한글로전해진다. 【을해년(1635) 계동(12월)의 달에 내가 양양을 맡아(부사, 襄陽府使) 가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그 때 새로이 국상(國喪)을 만나서 조정과 지방이 분 주하여길을떠날여가가없기때문에 자연한해가 3일을두고드디어길을떠났다. 3일만에 홍천(洪川)의 마을집에 도착하니 그날 이 곧 병자년(1636) 설날이었다. 초가집은 서너 칸 으로 집제도가 비록 소박하고 누추하지만 창문과 방벽이 조금 완전하여 따뜻한 기운이 맴돌고,부엌 아궁이와 뜰도 정결하여 섬세한 먼지가 없었으며, 짧은 울타리는 겨우 집을 둘려 있는데 가시나무를 섞여있고, 남쪽을 향하여 출입하는 곳이 열렸는데 땔나무와가시를사용하여싸리문을만들었다. 방 밖에는 텅빈 시렁 서너칸과 쌓아 놓은 곡식 십 여섬이 있었고, 그 곁에는 땔나무를 쌓아 놓고 시 냇물을길어다붓고불을때어밥을짓는다. 나는 돌아보면서 감탄하였다. 「즐겁기도 하는 생 활함이여 했더니 저네는 나의 많은 종들과 잘 갖추 어진주안상을보고반드시부러워하며두려워하고 공경했다.제가 어찌 내가 도리어 저를 부러워 함을 알겠는가?했더니」처첩들이일제히대답했다. 「참 으 로 부 러 워 할 만 도 할 것 이 라 하 니 저 들 이 비 록매우풍요하지않지만일정하게생산하는소득이 있어 생활 방법을 이어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우리 가 험난한 길을 걸어서 아들을 따라 이 관청에 온 것 도 장차 한차례 포식을 하려는데, 이미 배가 불러진 다음에도도리어쓸쓸하기가그전과같다면이는꿈 속 에 서 포 식 을 하 는 것 과 어 찌 다 르 겠 습 니 까 ? 」 내가 말했다. “그대들이 말한 것처럼 참으로 꿈 속에서 포식하는 거와 같았다.” 이에 감동하고는 설을만들어몽포(夢飽)로서글의이름을지었다. 옛적에 어떤 곤궁한 사람은 삼십일 만에 겨우 아 홉 번 만 밥 을 먹 고 그 밖 의 날 은 늘 굶 주 리 며 남 의 배가 부른 것을 부러워했는데, 이렇게 한 해를 보 낸 지가 여러 해 되었다. 문득 하루는 밤에 꿈을 꾸 었는데 성대한 반찬과 밥시루가 뒤에 가득하고 다 른 음식도 앞에 진열되어 있으니 이를 먹고서 기뻐 하고 배를 두드리면서 노래하였는데 도리어 배부 른 일이 꿈이 된 것이다. 다시 갑자기 깨고 보니 한 바탕의꿈이었다.처음깨었을때에는배가부른듯 하더니 잠시 후에 굶주림이 더욱 심해져 음식 생각 이 그전보다 갑절이나 더나니 꿈을 구지 않았더라 면굶주림이더심하지는않았을것이다.그러나굶 주 림 이 한 번 지 나 게 된 뒤 는 모 두 환 상 이 어 서 어 느 것 이 참 이 고 어 느 것 이 꿈 인 지 를 알 지 못 했 다 . 아 ! 배 부르게하는 방법이두 가지가있으니,하나는제 힘 으로 밥을 구해 먹어 배를 불리는 경우가 있고,남에 게 얻어서 배를 불리는 경우가 있다.제 힘으로 밥을 구해 먹어 배를 불리는 경우는 그 배부른 것이 항상 계속되지만, 남에게서 얻어서 배를 불리는 경우는 그 배부른 것이 항상 계속되지 못한다. 어찌해서 그 러한가? 남에게서 얻는 경우는 주거나 빼앗는 일이 남에게달려 있고,제 힘으로밥을구해먹으면 굶주 리든배부르든자기에게달려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라의 은혜를 입어 한 고을을 다스리는 일 을 여러 번 하였지만, 한 번도 내 힘으로 밥을 먹은 적이없다.오직벼슬하여녹봉을받는것에의존하 였으니, 바깥에서 얻은 것이라 하겠다. 이 때문에 벼슬을 얻으면 배가 부르지만 얻지 못하면 굶주리 게 되 었 다 . 십 수 년 이 래 로 여 러 번 배 가 불 렀 고 여 러 번 굶주렸다. 여러 번 꿈을 꾸었고 여러 번 꿈에 서 깨어났다. 굶주리기도 하고 배부르기도 하였고, 꿈을 꾸기도 하고 꿈에서 깨어나기도 하였다. 그러 다나이가일흔이가까워졌다.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굶 주린 것과 배부른 것을 모두 하나의 커다란 꿈으로 돌릴 수 있을는지. 굶주리는 것과 배부른 것, 잃고 얻는 것을 마음에 개의치 않게 되기를 바란다. 아! 이제야나는이런것을면할줄알겠구나】 1636(丙子)년에 청나라 사람들이 큰 난리를 일 으켰는데 적병이 한양에 가까워지자 임금은 남한 산성으로 옮겨 피신하였다. 이때 공은 관리로서의 본분을 지키느라고 피난을 가지 못하고 외지에 나 가 있으면서 밤낮으로 걱정하며 속을 태웠는데 강 도(江都)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다 가 목이 쉬고 쓰러진지 한참만에야 깨어났다. 이에 병이 들어 채직하고 서산(瑞山) 동암(銅巖) 촌사 (村舍)로 돌아와 문을 닫고 정조를 지키다가 1642 년6월12일에돌아가시니향년72세이다. 선생의세대는어진선조임금이있어한번세상을 다스릴 기회가 장차 이르게 될 것으로 부푼 기대를 가졌다.그러나 임진왜란이 먼저 일어났고, 광해(光 海)의 폭군이 뒤를 이어 방자하였으므로 어두운 시 대를맞았고인조반정으로그뜻을펼치려하였으나 병자호란이 뒤를 이은 시대의 연속이었다 할 수 있 다.그러나선생은그중심에서항상곧고강직한성 품으로직언으로서일관하였다.그리고선생의문장 (文章)은뛰어나당대의석학들과어울리며많은시 문을 남겼다. 선비로서 백가지 행실과 큰 절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가정에 있어서는 효이고, 둘째는 조정에 나가서는 충이고, 셋째는 관직에 있 어서는 청렴이다. 이 세 가 지 선 행 을 모 두 얻은즉 이는 완성된 사 람 이 라 할 수 있 을 것이다. 선생은 선조·인조의 성세를 만나서 명관을 두루 거치면서 문장· 덕행·언론이 세상의 추중받는바가되었으 니 대개 당시의 어진 대부로서 또한 선비의 세 가지 큰 절의를 얻 었으니 상사(喪事)를 당해서 예절을 다하다 가 슬퍼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를 뻔 했으니 또한 효성이 아니겠는 가?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걱정하여 나라 일에 마음을 다했으니 또한충성이아니라하 겠는가? 누차 주·부 (州府)를 맡아 청백한 이름이 세상에 떨쳤으니 또한 청렴이 아니라 하겠는 가! 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라도 지녔다면 오히려 군자이다. 이 사람이여라. 할 수 있는데 또한 문학으 로써 사우들 사이에서 명성이 있었으니 어찌 공자가 이른바『행하고 남는 힘이 있거든 곧 학문에 힘쓴다 한자가아니겠는가?』 선생의 높은 학덕은 부음에 즈음하여 인조임금 이 내 린 친 제 문 (親 祭 文 )에 도 알 수 있 어 마 지 막 으 로인용해본다. 『순치2년(癸未,1642년)7월27일에국왕이신예조 좌랑 홍종운을 보내어돌아간 전참판 박홍미의 혼령 께제문을고하나이다.생각건대 혼령께서는 평소재 주를 갖추기가 어렵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구비된 사 람을구함이겠는가?관리는문사를익히지못하고문 장은 사업을 마련하지 못하는데 오직 경은 이를 겸비 하여 지성과 신의가 일치하여 문장은 날로 화려하고 관리로서는 날로 겸손하였지, 개연히 생각을 일으키 매 경을 얻기가 어찌 용이할까? 경은 늙었으나 술 마 시고시읊는데는쾌활했었지,내가인재를가려발탁 함에 이르러서 내직?외직에 두루 시험했었지, 팔븡다 리에직책맡끼자맡은임무잘이행하고승지의자리 에두어도 왕명에오직타당하였지,이미 등용하고도 다하지 못했으니 어찌 쌓인 포무 폈을 까 ? 오래 침중했던 병으로 타향으로 유리하여 살았 지 그대를 잊지 않았는데 그대가 돌아갔음을 애석 히 여겼오 제사인즉 상정이라 하겠으나 나는 참으 로목이메고마음아프구려.』 /글사진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조선중기의문신으로문명을떨친관 포박홍미선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관포공종중묘원(납골묘)상단가운데관포공묘(네모안),인천출신인관포박홍미선생이서산과인연을맺게된데에는서산출신 의월사(月沙)이정구(李廷龜)와의교 분에서비롯된다할수있겠다.1622년월사이정구가중국으로사신을떠나게되는데사신을따라갈종사관으로관포선생이선발 되어함께중국을다녀온다.이때관포 공의탁월한문장을조선의대표적문장가인월사이정구와함께유감없이떨쳤고이일로인하여관포공은월사이정구의두터운신 임을받게되며두사람간에는지속적 인교류가이어진다.한시대를풍미하던문장가이며지조있던충신,관포박홍미선생은병자호란으로인조가청나라에항복했다 는비보를전해듣고분을삭히지못해 지병을얻게되는데이때그는서산동암촌(銅巖村)으로낙향하여생활하면서서산은그의세거지가된다. 선생의가계(家系) 관포 박홍미 선생 신도비. 충남 서산시 인지면 산동리 121 정 각사입구. 창원대도호부사 박홍 미 선정비(창원 용지공 원 내). 관포공이 창원 부사로있을때(1623.12 ~1629310) 청렴한 덕 으로 백성들을 잘 다스 린 것을 기리기 위해세 운비석이다. 선생의생애(生涯) 두룡포기사비(경상남도 통영시 세병로 27)는 1974년 12월 28 일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2호로 지정되었다. 세병관 경내 의수항루뒤편팔작지붕비각안에있으며높이214cm, 너비 90cm, 두께 20cm의 곤양석(昆陽石)으로 만들어졌다. 제6대 통제사인이경준(李慶濬)이당시의두룡포에삼도수군통제영 을설치한치적(治績)이새겨진사적비로1625년(인조3)제19 대 통제사 구인후가 세웠다. 당시 창원대도호부사 박홍미(朴 弘美)가지은비문에는이비를세우게된경위,이경준통제사 의가문과약력,통제영을두룡포로옮기게된이유,그리고이 경준통제사의혜안(慧眼)과업적등이기록되어있다. 국역관포집-2권1책.고활자본· 필사본. 1846년(헌종 12) 6세손 인 동규(東奎) 등이 병자호란 때 유실되고 남은 것을 편집하여, 저자의아들인대이의유고와함 께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영한 (金寗漢)·홍경모(洪敬謨)의서문 과 권말에 민병승(閔丙承)의 발 문이 있다. 현재의 국역본은 199 8년월성박씨관포손종친회에서 발행했다. 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