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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5월31일 화요일 9 (제113호) 종합 ■법률상식 답 ▶법률상담전화 박도하법률상담소 010-5328-3823,062-233-7571 저는다니던공장에서일을 하다가기계에오른손이절단 되는 재해를 입었습니다. 요 양급여를받지못한다는취지 의 결정을 받아 이에 불복하기 위해 근로 복지공단에 심사청구를 하였으나 요양불 승인처분을 받았고, 여러 사정으로 인하 여불승인처분을받은지벌써1년이다되 어 갑 니 다 . 저 같 은 경 우 이 제 요 양 급 여 를 청구할수없는지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제72 조 제1항 및 제3항은 “보험급 여에 관한 결정에 대하여 불복 이 있는 자는 공단에 심사청구 를할수있고,심사청구는보험급여에관한 결정이 있음을 안 날부터 90일 이내에 하여 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귀하의 경우와 같이 불승인 처분을 받은 것 을알고1년이경과한경우에는불승인처분 에 대해 다툴 수가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 그러나 판례는 “종전의 요양보상급여 취소처분이 불복기간의 경과로 인하여 확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요양급여청구권 이 없다는 내용의 법률관계까지 확정된 것은 아니며, 3년의 소멸시효에 걸리지 아 니 한 이 상 다 시 요 양 급 여 를 청 구 할 수 있고 그것이 거부된 경우 이는 새로운 거 부처분으로서 위법여부를 소구(訴求)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대법원 1993. 4. 13.선고 92누17181판결), “요양불승인처분이 불복기간의 경과 로 인하여 확정되었다 하더라도 그 불승 인 처분의 대상이 된 부상이 업무상의 사 유에 의한 것인지의 여부까지 확정된 것 은 아니므로,그 부상으로 인한신체장해 가 업무상의 재해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별도의 처분인 장해보상급여처분을 다툴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대법원 1994. 11.8.선고 93누21927판결). 따라서 구하의 경우에는 비록 요양불 승인처분에 대한 불복기간이 경과되어 위 처분이 확정되었지만 소멸시효가 완 성되기 전까지는 다시 요양급여를 청구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호에는 ‘산재보상금 수령 후 과실 있는 사용자에게 위자료청구가가능한지’를게재합니다.> 산재보험급여거부처분후재청구가가능한지 문 蘆江 朴 來 鎬 ▲全南長城出生 ▲본보자문위원 ▲長城筆巖書院선비학당학장 ▲성균관부관장 生 不 還 家 (생불환가) 살아서가정으로돌아오지않는다라는뜻. 본 四字成語는 梅軒 尹奉吉(매헌 윤봉 길) 의사께서 1930년 3월 6일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기 전 남 기신 시구(詩句)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 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丈夫出家生不還)는 구절에서 편성한 것이다. 필자는 장성문화원 문화 교류 사업으로 이달 16일 문화 가족들과 충남 예산(禮山)군 일원을 탐방하게 되 어 우리 수산사 집강(水山祠 執綱)인 이 종창님과 짝을 이루었으니 이종창님은 봉산(鳳山)이씨로 세종대왕의 스승인 이 수(李隨)선생의 후손이다.8시 40분에 차 량 두 대로 장성을 출발한 우리 일행은 덕 산면 수덕사에 잠시 들러 김종하 해설사 의 설명을 들었고 시량리에 도착 김선자 해설사의 인도에 따라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의사의 위패를 모신 충의사(忠義 祠)에 들러 옷깃을 여미고 참배를 마친 뒤 기념관도 두루 살펴보았다. 그 해설과 기록에 의하면 윤의사(尹義士)는 이 고 장 출신으로 11세 때 덕산(德山) 소학교 에 입학하였으나 3·1운동의 불길을 보고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받지 않겠다고 자퇴 한 뒤 독학을 하다가 19세 때에 야학(夜 學)을 설치하였고 22세에는 월진회(月進 會)를 조직하여 고향 청소년들의 계몽에 노력 하였다. 1930년에 가족 몰래 만주와 중국 청도를 거쳐 상해로 망명하여 세탁 소, 외교원, 모직공장 직공 등을 하면서 김구 선생의 지시를 받아 1931년 한인애 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이러한 선서문(宣誓文)을 지었다. 「나는 적성 (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 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一員) 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왜적의 장교를 도육(屠戮)하기로 맹세 하나이다. 대한 민국 14년(1932)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한인애국단 앞」이라고 되었다 다음해 4 월 29일 일본 천황의 생일 축하및 상해사 변(上海事變)전승기념식을 거행하는 홍 구(虹口)공원에 들어가 본부석에 폭탄을 던져 상해 일본 거류민단 단장 카와바타 (河端貞次)와 일본군 상해 파견군 사령 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 등을 살해하 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 중 장,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蔡) 등에게 중 상 을 입 힌 다 음 현 장 에 서 체 포 되 어 상 해의 일본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 받 고 일본으로 압송되어 가자나와(金澤)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하였다 님께서 가 신 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 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하였고 민간인으 로 구성된 기념사업회는 동아일보 회장 인 일민(逸民) 김상만 선생을 회장으로 우공(愚公) 송준빈 현 성균관 부관장님 을 부회장 겸 홍보부장으로 모시고 본국 은 물론 중국 홍구공원에 이르기까지 기 념관 건립 등 많은 사업을 추진하여 님의 고귀한 애국정신을 기렸다. 그뒤 2012년 황의만 회장, 윤용훈 총무부장, 선농정사 (先農精舍) 주인 윤열상 씨 등이 님의 의 거 80주년을 기념하는 한시백일장 시집 을 간행하였는데 필자 역시 고문으로 참 여 찬조 시(詩)한편을 지었다.이제야 달 려 와 알 묘 (謁 廟 ) 한 나 는 님 의 사 당 충 의 사 앞에서 한참 동안 눈을 감고님처럼 애 국의 죽음길을 뫽아야겠다고 다짐을 하 기도 하였다. 14시 10분경 신암면 용궁리 추사 김정희 선생의 고택에 도착 송애순 해설사의 설명을 들었 다. 선생의 호(號) 는 많다고 하는데 추사와 완당(秋史, 阮 堂)이 그 대표적이다. 선생은 판서인 김 노경(金魯敬)의 아들로 백부 노영(魯永) 에게 입양 되었고 당시 대학자인 박제가 (朴濟家)선생의 제자였다. 선생은 순조9 년 1 0 월 에 사 신 으 로 중 국 에 들 어 간 아 버 지를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석학들을 만났는데 최고 석학인 옹방강(翁方綱)은 선생의 경술문장(經術文章)이 해동제일 (海東第一)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 다. 선생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자 로 벼슬은 대사성 병조참판에까지 이르 렀으며 글씨와 그림으로 대가(大家)를 이루었는데 선생이 남긴 세한도(歲寒圖) 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큰 가르 침을 주고 있다. 이번 장성문화원의 문화 탐방은 가장 의미 있는 행사였기에 공영 갑원장에게감사를느낀다. 追慕尹義士義擧(추모윤의사의거) 梅老堂堂行率先(매노당당행솔선) 梅軒선생당당하게솔선하여행동하니 魂飛魂散又驚天(혼비혼산우경천) 혼은 날아가고 넋은 흩어지고 하늘도 놀랐다네 殺身救國高風起(살신구국고풍기) 몸을 바쳐 나라 구원했으니 고상한 바 람 일 으 켰 고 向寇投丸壯志全(향구투환장지전) 왜구 향해 탄환 던졌으니 씩씩한 의지 온전했네 追慕偉人宜獨特(추보위인의독특) 위대한 인물 추모 사업은 독특해야 마 땅하고 奉尊義士出群賢(봉존의사출군현) 의로운 선비 받드는 데는 群賢 가운데 뛰어나야해 煌煌虹口當時事(황황홍구당시사) 반짝이는홍구공원그당시의사건은 與日偕明萬世傳(여일해명만세전) 해와 더불어 함께 밝아 천만세를 전하 리라 ■蘆江 先生의 漢字 이야기 客登周覽碧松間(객등주람벽송간) 객이올라벽송간을주람하니 遺跡先賢重泰山(유적선현중태산) 선현의유적이태산같이무겁더라 懸額尙新淸氣箸(현액상신청기저) 현액이상신하여청기가들어나고 掛詩依舊瑞光環(괘시의구서광환) 괘시가의구하니서광이둘렀더라 渭江娥月琉璃淨(위강잠월유리정) 위강에담긴달은유리처럼맑고 搜勝凝烟翡翠斑(수승응연비취반) 수승대응긴연기는비취처럼아롱지네 次韻吾톡多有感(차운오제다유감) 우리들의차운에느낌이많은데 優遊盡日破愁顔(우유진일파수안) 진일토록우유하니기쁨이얼굴에가득하네 訪樂水亭有感 (방락수정유감) 葛田 朴聖根 아비야 식 은 밥 먹 고 가 라 그 말 씀 이 정 겹 구 나 당숙모님하신말씀어매말씀같사오니 숙모님돌아가시면어느분이또하실까 더운밥못잖은정든말씀이여 중병을앓아누우신그모습이가여워라 야윈손부여잡으니따스함이흐른다 백약이무효이니자식은속이탄다 인생은높낮이에죽음길은같구나 당숙모님 서럽던일접어두시고좋은일만안고가소 네마음내알았다고맙다기성아바 두눈에낙루하시니측은함이한이없다 당숙모아베종반내종반느낌으로 돌아서니재종이라멀어짐이안타깝다 천리(千里)가이러할지니어찌아니서러우랴 극락왕생하시어서자손들살펴주소 그정성사랑으로축원하여주옵소서 하직인사하고나니눈물이앞을선다 커피먹을나나식은밥먹고가라 그말씀이그립구나귀에쟁쟁하더이다 당숙모님꾀병처럼일어나시어다시말씀하소서 식은밥의 정 박효준 묘골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 리를 일컫는 것으로 도시화와 산업화의 바람이 거센 오늘날에도 옛 전통사회의 마을모습을고스란히보여주고있으며, 조선조 충신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 킨사육신을배향한육신사와사육신기 념관, 보물 태고정, 단종복위를 모의하 다가사전에발각되어충정공박팽년선 생의아버지한석당박중림선생을비롯 한 3대 9명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려 한삼충각,충효당,금서헌,도곡재,삼가 헌, 낙빈서원 등 유적이 즐비하여 이곳 을 찾아 선조의 충절을 기리고 유훈을 되새기고자 기획한 ‘묘골 방문의 날’이 지난 5월 8일 제20회를 맞으면서 이제 성년이 되었다. 행사를 주체한 인규 청 년회장은20년을지내오는동안어려움 도 있었으나 이제 성년의 나이와 같은 스무 돌을 넘긴 만큼 더 성숙하고 더 발 전하는 모습으로 30~40주년을 계속 맞 이할것이라며당찬목표를설정하고최 선을다할것을다짐했다. 이어 도규대종회장은20년전(前)저희 선고(先考,故박노택 대보사 창업주)께서 당시청년회장이었던저에게200만원을선 뜻내놓으면서무엇인가의미있는행사를 기획해 볼 것을 제안한 것이 묘골 방문의 날의효시였는데벌써20회를맞이하고보 니감회가새롭다며그동안청년들의노고 를 치하하고 더 많은 후손들이 함께 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하여 주실것 을 당부했다 . 이날 행사는 500여명의 후손이 함께 하면서 대 성황을 이룬 가운데 1부 기 념식에 이어 보물을 찾아든 어린이에 게는 푸짐한 선물이 주어졌고, OX퀴 즈와 줄다리기, 투호경기 등으로 이어 지 는 동 안 참 석 한 모 든 분 은 하 나 가 되 어행사의참다운의미를되살렸다. 특히 3代가 함께 한 가정이 늘면서 앞으로의 미래를 더욱 밝게 한 가운데 희박해진 숭조사상 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본보기가 되어 최근 밥만 먹고 헤 어 지 는 여 타 종 친 회 에 큰 귀 감 이 되 었 다. /자료제공박종우대보사상무 순천박씨제20회묘골방문의날성료 500여일가분을챙기느라청년들일손이바쁘다. 도규대종회장 인규청년회장 5.16민족상 재단(서울 마포 도화동) 은 2016년도 제51회 5.16민족상 수상자 로 사회.교육부문 한정희(韓貞姬)서양 화가, 산업부문에 최철수(崔哲洙) (주) 코리아인스트루먼트 회장) 안전보장부 문 하연순(河然淳) (재)금곡학술문화 재단이사장)을선정하고시상했다. 이 세분에게는 상금 3천만 원과 정장 (Badge)그리고상패가주어졌다. 유용근(兪龍根;명지대학교 재단이사 장) 재단법인 5.16 민족상 이사장은 기 념사에서 수상자들의 공로를 치하하고 50년 전에 본 재단을 설립해 주신 박정 희대통령과김종필총리께도이자리를 빌려경의와감사를드린다고말했다. “5.16혁명이 있었기에 우리나라가 국태 민안을이룩하였으며,원조받는나라에서 지원하는나라로발돋움하여국민소득3만 불을바라보는시점에서있습니다.그러나 일부정치인들은쿠테타라고하는등의얘 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는이런이야기들이이세상에서사라졌으 면하는마음입니다”라는말도했다. 1996.3.24일의 설립취지문에서 본 재 단 총재이셨던 박정희 대통령은 다음 과같이말했다. “대한의 하늘 아래 어디선가 어제도 오늘도 조국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어 묵 묵히쉬지않고일하고있는수많은숨은 일꾼들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찾아내어 앞장세우 겠습니다.아니그러한 집단을 찾아서 손 에 손을 잡고 함께 나가겠습니다.이러한 일이야 말로 민족역량을 발굴함이오 선 양함이오 확충함이며 사회에 격려와 용 기와 희망을 북돋아 줄 것입 니다.민족의 예지와역량을다시가다듬어야할이시 점에서우리의앞날을밝힐수있는횃불 을점화코자여기『5.16민족상』을제정하 렵니다. 『5.16민족상』은 바로 민족의 얼 을,민족의단합을,민족의전진을추구하 려는강력한우리의지의표징입니다.” 5.16 민족상은 지금까지 학예부문을 비롯한 9개 부문에서 모두 314명에게 본 상을 시상하였다. 고령박씨 대종회 에서도 축하화환을 보내고 박선호 상 임부회장과 박정하 사무총장이 참석 자리를 함께하였다. /자료제공 박정하 고령박씨대종회사무총장 제51회5.16민족상수상식 민족의 예지와 역량을 다시 가다 듬어야 할 이 시점에서 우리의 앞 날 을 밝 힐 수 있 는 횃 불 을 점 화코자..... 5월8일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권유 후당과이사장당두할머님의당호를지 어 올리고, 의덕비를 준공하는 뜻 깊은 날을 맞이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후 손들을대표한종친회원들이,두할머님 을 추모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한 자리에모였습니다. 저는 권유후당 할머님의 18대 후손이 되고,이사장당할머님의 16대 후손이 됩 니다. ‘구소명 종친회’의 초대로부터 다 섯번회장을맡았던직제동은선생의큰 손자입니다.제가다섯살이됐던어린저 에게직제선생은천자문과‘함양박씨파 보’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안동 권씨와전의이씨두할머니가계시지아 니하였다면, 우리 집안은 존재하지 않는 다.’라고가르쳐주셨습니다.직제선생은 두 할머니에 대해서 애절하고 감사한 마 음을 표현하면서, 후손들이 두 할머니의 공적을 추모하고, 감사하며 후손들에게 현창(顯彰)하여주기를부탁하였습니다. 근래 10여년간 두 할머니의 역사와 생 애 를 배 우 고 알 수 있 는 기 회 를 갖 게 되었습니다. 우리 박씨가 조선 초기에 끔찍한 화란을 겪었습니다. 그 때에 권 유후당 할머니는 환난가운데서 살아남 으셨습니다. 할머님의 어려운 처지는, 기록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힘 드셨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환경에서 1 0살 된 신 자 동 을 훌 륭 하 게 가 르 쳐 키 워 서, 가문의 새 뿌 리가 되도록 하신 은덕이, 얼마나 큰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사장당 할머 니는 3자 1녀를 낳 으시고, 52세에 홀로 되시어 남편 이 판공 의 묘 아래에 사시면서,자녀 교육에 정성 을 다하셨습니다. 혹, 허물이 있거나 학업 을게을리하면,이판공의묘정에끌고가 동자석에 손을 메어,매를 치셔 큰 선비가 되게하셨습니다.만년에가문이창성하여 87세에 조정에서 숙부인의 직첩을 받으셨 습니다.이사장당할머님의높은공덕을,2 015년 11월 30일에‘한빛신문’ 박상섭 편집 국장은이렇게글을써서,5백만박씨에게 현창하였습니다. “전의 이씨 할머님은 맹 자의 어머니가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교육 환경을 찾아 세 번을 이사했다는 고 사로맹모삼천지교를떠올린다.그리고우 리나라에서는율곡선생의어머니,신사임 당을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삼고 있다. 그 러나전의이씨는철부지아이들을훈육하 기위해,남편의묘전을택했다.일찍이 돌 아가신아버지를대신하여,훌륭히자라서 집안을부흥시키고나라를섬기라는깊은 뜻이 있어, 전의 이씨는 맹자의 어머니와 율곡선생의어머니신사임당을능가한다 고 말할 수 있다.”라고 썼습니다. 오늘두할머님과조상들이계신세장지 에 의덕비를 세우고, 두 할머님께 권유후 당과이사장당이라는당호를 지어올리고, 높고 깊은 공덕을 칭송하는 비문을 돌에 새겨서, 후손들이 영세토록 감사 찬양하 고, 나라와 세계에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 고 다짐을 하는, 거룩한 성지로서 봉헌하 는식전이되었습니다.끝으로권유후당과 이사장당 두 할머님의 ‘생애와 교훈’을 배 워서실천하는후손들이되기를바랍니다. 두할머님은첫째,‘가정의가치’를실천하 셨습니다.자녀교육을희생과열성을다하 여성공적으로이룩하셨습니다.청강이제 신 선생은 함양 박씨를 ‘효우세가’라고 칭 찬하였습니다.둘째,‘이타적 삶’을 가르치 셨습니다. 후손들이 개인의 영달과 자기 가문의이익만을위해서일하는사람들을 넘어서, 백성을 위하고 국가가 올바로 나 가도록하는데기여하는인재들로키우셨 습니다.셋째,‘참다운 여성상’을 본 보이셨 습니다. 모성애를 바탕으로 한 사랑과 헌 신으로 주체가 되어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에모델이되신여성시대의선구자이 십니다.사랑하고그리운권유후당과이사 장당 두 할머님! 오늘 영원히 기뻐하시고 많은영광을받으시옵소서!그리고후손들 을계속하여보호하시고육성하는음덕을 베풀어주십시오.더나아가서이자랑스러 운 의덕비와 세장지에, 많은 후손들이 아들딸과 손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두 할머님과 훌륭한 선조들의 업적을 후 손들에게 가르치는, ‘교육의 장소’가 되도록 이끌어주십시오. 대단히 감사 합니다. 그립고 고마우신 권유후당과 이사장당 두 할머님께 고합니다 박중현 함양박씨재경종친회장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