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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5월31일 화요일 4 (제113호) 기획 광주광역시 서구 송학누리길을 따라 봉황산 아래에 자리한 아담한 재실이 보인다. 정면4만 측2칸의 팔짝지붕 재실은 충주 박씨찬성공(휘지흥)의재실이다. 대 문 을 열 고 들 어 가 면 마 당 에 깔 린 조 경 석 과 담 장 에 한 번 더 놀란다.재실중앙은재사및회의를개최할수있도록하였고,상 량문과 건립기문이 걸려 있으며 일가육문장의 시(詩)를 새긴 편 액이눈에들어오고,좌우로방이있어편히쉬었다갈수있다. 일가육문장이라 함은 한 가문이 한 시대에 6명(찬성공 아들3 명, 손자 3명)의 뛰어난 문장가가 나와 가문을 크게 빛낸 것에 대한찬사(讚辭)이다. 추원재 사적비에 따르면 찬성공의 재사(齋舍)는 처음부터 이 곳에세워진것이아니다.정확한건축연대는알수없으나지금 의추원재에서위로100여 미터 올라가면 찬성공의묘소가있는 묘정에 세워져 있었으나 장구(長久)한 세월 경과(經過)로 건물 이훼손(毁損)되어개축이불가피하게되었다. 그러나 재각이 세워져 있는 장소가 제반(諸般)형편(形便)으 로 보아 부적함을 인정하고 심사숙고 끝에 지금의 장소로 이건 하여 1998년 착공하여 이해 11월 상량과 함께 다음해 1989년 11 월준공하였다. 이후에도 수차례 정비를 하였고,지난 해 담장과 마당을 산뜻 하게 정비하여 찬성공파 대종회 하열 회장과 종온 감사, 종우 총무 등 집행부 임원진과 후손들의 위선정신과 숭조정신을 엿 볼 수 있 다 . 찬성공 휘 지흥(智興,1411-1489)은 1411년 고려조에 성균 진 사로 감찰과 좌랑 의천,은산군사를 역임한 휘 소(蘇)와 고령오 씨사이의오형제중넷째아들로충청도회덕에서태어났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 한 것에 격 분하여 살 곳을 찾아 남으로 내려와 현 광주 봉황산(鳳凰山)아 래집을짓고순수함을보전하며깨끗이살았다. 그러나학문이 뛰어남을 알고 있는 권람이 수차례에 걸쳐 세조에게 천거하였 으나나아가지않고곧은선비의삶을살았다. 찬성공이 충청도 회덕에서 전라도 광주로 이거하는 과정에 득남하는과정에일화가있어소개해본다. 살곳을 찾아 남으로 향하던 중전남 장성입암산갈재에이르 러 날이 어두워지자 산막에 들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내가 너의 살 곳을 일러줄 터이니 지금 밖에 있는나의쌍마를타고가다가그쌍마가멈추는곳이너의살곳 이니라. 그 곳에 쌍마 중 한 마리를 매어 표를 해두고 오너라”하 였다.그쌍마멈춘곳이방마산이백마산으로바뀌었다고한다. 찬성공이 정착한 뒤2년 만에 본부인 하동정씨가 죽고 이천서 씨 처녀와 재혼하여 8년 만에 하촌공(荷村公) 정(禎)을 낳고, 찬성공의나이63세가되던어느날부인서씨와함께고향을찾 아장성입암산갈재를넘다산아래산막에서또하루를지내게 되었다. 이날밤 부인 서씨의 꿈에입암산위에서큰 바위가 굴러와 서 씨의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었다. 이듬해 1475년 5월 18 일 둘째아들이 태어났다.찬성공이 이 아이의 이름을 태몽에 따 라 아명을 입암으로 하다 뒤에 상(祥,시호 문간공)이라 했다.2 년 후 셋째아들 육봉공(六峯公) 우(佑)를 낳았다. 이들 삼형제 가 문장으로 세상을 울려 이들을 가리켜 당시 송나라에는 부자 삼소(父子三蘇)가 있고 동국(東國)에는 형제삼박(兄弟三朴) 이있다고하였다. 그리고 눌재(訥齋) 상(祥)의 중자(仲子) 진사공 민중(進仕 공 敏中)과 육봉공(六峯公) 우(佑)의 두 아들 연파공 개(煙波 公 慨)와 문충공 사암 순(文忠公思庵諱 淳)의 뛰어난 문장으로 인해 이들을 가리켜 다시일가육문장(一家六文章)이라 하여 이 들의주옥같은시(詩)와함께소개해본다. 찬성공의 제향은 음 10월 15일 묘제를 올리는데 우천시에는 추원재(追遠齋)에서봉행된다. 찬성공께옵서는 500여 년 전에 충청도로부 터 광주에 오셔서 방하동(芳荷洞)에 이르러 정 착하시고 자손번창의 기반을 공고(鞏固)히 하 셨습니다. 후손들은 공(公)의 묘하(墓下)에 제 각(祭閣)을 건립하고 선조의 음덕(蔭德)을 추 모해 오던 중 장구(長久)한 세월 경과로 건물 이 훼손(毁損)되어 개축이 불가피(不可避)하 게되었습니다. 제각의 전(前) 소재지는 제반형 편으로 보아 부적합을 인정하고 심사숙고 끝 에 만부득이(萬不得已) 묘정(墓廷)에서 다소 떨어진현지(現地)로 이전하였습니다. 기금(基金)은 공(公)의 선고(先考)이신 판서 공(判書公)의 분재(分財) 4천만원과 지난 병인(丙寅)년 수보(修譜)시 각 문 원(門員)의성금1천8백만원및찬조금으로 회덕문중1백만원과 남평공 后 의휘세기(世杞)문중1백만원등6천만원이 소요되었습니다. 戊辰(1988)년11월입주상량(立柱上樑)하고 己巳(1989)년8월준공한바 금후(今後) 본(本) 제각(祭閣)이 유구(悠久)히 보존되고 만세(萬世) 무궁(無 窮)토록 자손이 번성(繁盛)하며 인재가 속출(續出)하도록 높으신 선영(先 塋)께옵서수호(守護)해주시옵기를복원(伏願)하옵나이다. 단기4322년8월5일 □登瑞石山賦荷村公諱禎(등서석산부 하촌공휘정) 處人世之僻陋動皆窒而不通 (처인세지벽루하니동개질이불통이라) 思登高而望遠 一 余之愁胸 (사등고이망원하야일탕여지수흉이라) 穿芒鞋而뱌薇陟瑞石之層峯 (천망혜이문벽하고척서석지층봉하야) 超積蘇而獨立撫石上之矮松 (초적소이독립하고무석상지왜송이라) 顧鷹 펭之瞥起一瞬過乎長空 (고응준지별기하니일순과호장공이라) 헙學仙之無術塚맴맴於蒿蓬 (창학선지무술에총유류어호봉이라) 遊余目而四顧天杳杳而無窮 (유여목이사고하니천묘묘이무궁이요) 水練白而千回山戟立而萬重 (수련백이천회하고산극립이만중이라) 彼城邑之傍羅齊道上之蟻封 (피성읍지방라는제도상지의봉이요) 惟人物之絡繹奇뼜菽於纖洪 (유인물지낙역은기부유어섬홍이라) 問頭流其何許複嶺限乎天東 (문두류기하허하니복령한호천동이라) 望遠海之渺茫耽羅塊於目中 (망원해지묘망하니탐라괴어목중이라) 인간세상편벽하고비루한데살다보니움쩍하여도다막히고통하지를 않는다. 높은데올라먼곳을바라보며나의시름찬가슴후련히씻고싶어져 짚신을신고담장이를붙들고서서석산의층진봉우리를올라가 쌓인나무뛰어올라홀로서서돌 위의난장이 소나무를어루만진다. 매가별안간일어나는것돌아보니깜짝하는사이에먼하늘지나간다. 서글프다신선배울 재주는없고무덤은쑥대밭에줄줄이 늘어서있다. 내 눈을 움 직여 사방을 돌 아보니 하 늘은 까 마득이 다할 줄을 모르고 물은깁같이 하얗게천번이나구비치고산은창같이 서있게만겹이라 저성읍(城邑)이 한쪽에늘어있는것은길위의개미 두덕과 같다 오직사람들이 연닿아잇는것은하루살이가공간에붙여사는거라 頭流山이 있는가를물어보니포개진산들이 하늘동쪽을막고있구나 먼바다까마득한 것바라보니耽羅가눈속에덩어리져보인다 하촌공 박정의 자(字)는 창국(昌國), 호(號)는 하촌(荷村), 찬성공(휘 지흥)의 장남이다. 성균 생원으로 학문이 뛰어나 점 필재김종직선생이호남을살필때한번보고기이하게여겨예 모(禮貌)를 차려 말하기를 “참으로 재상(宰相) 재목(材木)이 다”하였으나 아쉽게도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져 아쉬울 뿐이다. □次子美韻二首文簡公訥齋諱祥(차자미운이수문간공눌재휘상) 無他斷斷少人知曾結幽蘭遺所思 (무타단단소인지하야증결유란유소사라) 春到江湖和遠夢雲重宮闕渺佳期 (춘도강호화원몽하고운중궁궐묘가기라) 梅前獨立天將暮月下孤吟夜欲移 (매전독립천장모요월하고음야욕이라) 腸斷此時垂寸寸眼中標格展淸詩 (장단차시수촌촌에안중표격전청시라) 行止巫咸未必知莫懷椒服費遐思 (행지무함미필지니막회초서비하사하라) 名兼吏隱人誰信身任浮沈我不期 (명겸이은인수신가신임부침아불기라) 風際斷蓬相輾轉江中輕강互推移 (풍제단봉상전전이요강중경가호추이라) 靑燈半壁回春夢臥誦瓊奴驛柱詩 (청등반벽회춘몽하야와송경노역주시라) 子美의詩에次韻하다문간공눌재휘상 다른 마음 결단코 없음을 아는 사람 적어 일찍이 幽蘭 매어서 생각하는 이에주었다 봄 은 江湖 에 와 먼 꿈에 섞 여들고 구름 겹겹이 궁궐에 끼어 만 날 기약 아 득하다 매화앞에홀로 서니하늘저물려하고달 밑에서외로이 읊조리니밤깊 어간다 이때에마디마디애끓고눈속의그대의풍채淸雅한 시펼친다 하고 안하고 하는 것은 巫咸이 반드시 알지는 못할 터이니 복채 안고서 먼 앞 일 생각하 는 일 하 지 말 아라 이름이 吏隱겸한 걸 남이 누가 믿겠나몸을 浮沈하는데로 내 맡기고나 는 기대하 지 않 는다 바람바지의끊기운쑥대서로들딩굴고江복판의가벼운배들서로 밀며 움직인다 푸른등불 벽중간비추는데봄 꿈돌아와누워서瓊奴驛 驛柱의詩를낭 송해본다 문간공 박상(1472∼1530)은 연산군 2년(1496) 23세의 나이 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 정시문과 을과에 급제하였다. 교 서관정자(校書館正字)를 시작으로 조정의 요직을 거쳤으며 자 원하여 담양부사로 나갔으며 충주목사로 재직할 때 청백리로 선록(選錄) 되었다. 특히 죽음을 무릅쓰고 신비의 복위를 주청 하는 상소를 올려 대의를 지키고 의로움을 실천했던 인물로도 유명하다.시와 문학에 남다른 식견과 조회가 깊었으며,이조판 서에추증되고시호(諡號)는문간(文簡)이다. □黃金臺賦六峯公諱祐(황금대부 육봉공휘우) 曰自蘇代之返燕 寄毒鰒於村舌 (왈자소대지반연하야 기독석 어촌설이라) 君旣吐珠而不含 權奸弄其樞極 (군기토주이불함하야 권간농 기추극이라) 齊乘 而襲破 勢不堪於댁角 (제승흔이습파하니 세불감어기 각이라) 幸昭王之無恙 紹甘棠之遺烈 (행소왕지무양하야 소감당지유 열이라) 重曰곧歌世遠緇衣俗邈(중왈갱가세원이요치의속막이라) 層臺疊셴 徒事遊樂(층대첩사에는도사유락이러니) 獨有昭王好賢而築(독유소왕은호현이축이라) 納約自찍 非즉奚得(납약자유는비외해득고) 爪牙羽翼朋來 簪(조아우익이붕래합잠하니) 拔齊報씁 非毅何能(발제보수는비의하능고) 召公之業職此不興(소공지업은직차부흥이라) 後豈無賢君自不招(후기무현이랴군자불초라) 黃金萬鎰難鑄燕昭(황금만일도난주연소라) 이르되,蘇代가燕나라로 돌아가서부터는한 치혀에다독바늘을붙였다 임금이미 구슬토하고머금고있지않아권세잡은奸臣이 그 나라樞要 를가지고놀았다 齊나라에서 흠이 생긴 틈을 타서 습격하여 쳐부수니 그 기세를 맞겨룰 수없었다. 다행이 昭王은탈이 없어甘棠의遺業이었다. 홀로 昭王이 나와서만은賢良한 인물이 좋아하여건축하였다. 임금이 이해하는데서부터성심을다하는일은郭즉가아니면어찌해내 었겠나 輔弼과 羽翼이 될인물들떼지어모여들었으니 齊나라를굴복시켜 원수를갚는일은樂毅아니고서야 어찌해내었겠는가招公의事業은여기서다시일어났다. 그 후엔들 어찌 賢良한 인물 없었으랴마는 임금이 본래 초청하지 않은 거라 黃金萬鎰로도燕나라의昭王은빗어내기어렵다. 육봉공박우(祐)는 1510년 문과에 급제하여 공조, 병조정랑 등 주요 관직을 거쳐 강원도관찰사, 우승지, 남원부사, 도승지, 성 균관 대사성,병조,이조참의 한성부좌윤 겸 동지춘추관사를 역 임하고 청백리에 녹선 되었으며,아들 사암 박순으로 인해 영의 정에 추증되고 문장과 도덕으로 세상에 빛났으나 시문이 산일 (散逸)되어중형(문간공)의눌재집부록에실어졌다. □問字壯 之論對策進士公諱敏中(문자획지논대책진사공휘민중) 탔謂邃古之初奠旴混茫制度之未作 (절위수고지초는휴우혼망하고제도지미작이요) 文爲之未具標枝野鹿之俗醇樸無爲 (문위지미구라표지야록지석은순박무위요) 而結繩之政簡如自然之化純如天地造化之妙 (이결승지정은간여자연지화하고순여천지조화지묘라) 人物性情之理沖漠而不露混融而無著 (인물성정지리는충막이불로하고혼융이무저라 及其聖人神會於俯仰之際心悟於觀察之間 (급기성인이신회어부앙지제하고심오어관찰지간하야) 憂書鳥篆之法有設形象措事之體有立 (충서조전지법이유설하고형상조사지체가유립이라 然後道之茫爾隱者彰焉理之冥然藏者開焉 (연후에도지망이은자창언하고이지명연장자개언이라 禮藥刑政有所籍三綱五常有所賴 (예약형정이유소적하고삼강오상이유소뢰라 萬世文明之化盖亦濬源於斯 (만세문명지화도개역준원어사라) 먼옛날 초창기에는질박하고혼미해서制度가만들어지지않고文字 使 用도미비하였고임금은높은나뭇가지같았고백성들은들판의사슴같았 던풍속이 순박무위하여結繩의정치는간단하기가자연의변화같았고순 수하기가 천지조화의 묘치 같았습니다 사람과 사물의 性情의 이치는 혼연 하여노출되지않았고뒤섞여융합하여드러나지않았습니다그들의聖人 이 하늘을 우러러보고 땅을굽어보는사이에신명으로 이해하고관찰하는 틈에마음으로 깨닫기에이르러憂 書와鳥篆의법이 마련되게되었고象形 과 措事의體가성립되게되었던것입니다 그렇게 된 후에 道로 망연하게 숨어있는 것이 밝히 드러나고 이치로 어 둡게 감춰진 것이 트여지게 되어 禮藥과 刑政이 의지할 곳이 생겼고 三綱 과 五常이 의뢰할곳이 생겼습니다萬世의文明의敎化역시거기서근원이 생겨났던것입니다 진사공 박민중(進士公 諱 敏中, 1502∼1536)은 중종14년에 진 사에 입격하고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니 당세에 일가 육문장(一 家六文章)이라 일컬어졌다. 평생 저술한 것이 병화(兵火)로 소 실되고 다만 무왕불포록(武王不褒錄)과 이재론(夷齋論) 한편 이 있어 동문선(東文選)에 들어있고 또 선집(選集)에 부록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불행이도 일찍 세상을 떠남에 아쉬움을 주고 있다. □亭子船煙波公諱慨(정자선연파공휘개) 裝舟載素月擬價輕黃金(장주재소월하니의가경황금이라) 不向宦津繫平生蒼海心(불향환진계하고평생창해심이라) □臨終口號煙波公諱慨(임종구호연파공휘개) 支離一疾差無藥歸濯靈泉玉溜寒 (지리일질차무약하니귀탁영천옥류한이라) 從此便敎毛骨改碧雲天外駕翔鸞 (종차편교모골개하야벽운천외가상란이라) □ 정자선 연파공휘개 배채비하고흰달 실으니그 값이 黃金도대단치않다 관가의나루터에는매지않고서한평생滄海에의마음이라 □임종구호연파공휘개 지리한 병 낫 는 약 없으니 泉으로 돌아가옥 같은물에씻어버리는거라 이제부터毛骨바뀌어지게하여 푸른구름하늘밖으로 나는난 새타고가리라 연파공박개(煙波公諱慨,1511∼1586)호(號)는 연파(煙波) 이다. 향시(鄕試)에 두 군데를 보아 모두 장원하여 성시(省試, 향시에서 선발된 이들을 예부에서 시험하는 제도)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한 선비가 엎어져 짓밟혀 죽었다.이를 보고 말하기를 “선비가 하나의 명예를 두고 다투느라 사람을 죽이고도 돌아볼 여가가 없는데 이르니 이는 인인(仁人) 열사(烈士)가 나가는 곳이아니다.”라고 말하고 뒤돌아 돌아와 이때부터 과거를 사절 하고 나주 고향에 복거(卜居)하여 강호(江湖)에 거쳐하면서 낚 시질로 스스로 즐거움을 삼아 일찍이 시 일절을 짓고 읊으니 「배를 꾸며 흰 달 실으니/ 값을 따지면 황금도 헐 값이구나/ 벼 슬 나루에 매지 말거라/한 평생 푸른 바다 마음이라」라고 하니 이 시가 굴러 구중궁궐에 들어가게 되어 선조임금이 특별이 어 사에게 명하여 그가 숨어사는 곳을 엿보니 거문고와 책이 방에 가득하고 정자는 강을 눌러 있는데 노쇠한 얼굴에 백발을 하고 그 틈에 쓰러져 평상에 엎드리고 기대고 하며 바람을 향해 길게 읊조리다가 별안간 아이 종을 불러 배를 젓게 하고 여울을 내려 가안개낀물결을오르내리며해가기울어도돌아갈줄을모르 는 것이었다. 어사가 본대로 복명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탄식하 고 은명(恩命)이 여러 차례 내렸으나 끝내 나가지 아니하여 하 루는 동생 사암공이 일찍이 경연에 들어가니 임금이 말하기를 “장주재소월(裝舟載素月, 배를 꾸며 흰 달 실으니)의 싯 귀는 처사(處士)의 시가 아니오. 경이 나를 위하여 나오도록 권할 수 있겠오.”하였다.그 다음날 특명으로 한성참군을 제수하여 부득 이 취임하여 잠깐 있다가 현감에 옮겼으며 통정대부에 가자되 었다. □訪曺雲伯二首文忠公思庵諱淳(방조운백이수문충공사암휘순) 醉睡仙家覺後疑(취수선가각후의하니) 白雲平壑月沈時(백운평학월침시라) 쏟然獨出脩林外(소연독출수림외하니) 石經 音宿鳥知(석경공음숙조지라) 靑山獨訪考槃來(청산독방고반래하야) 袖拂秋霞坐石笞(수불추하좌석태라) 共醉濁말眠月下(공취탁료면월하러니) 鶴붕松露滴空盃(학번송로적공배라) □방조운백이수문충공사암휘순 술 취해 푹 자고 깨 어보니 이 곳이 신선의 집인가 흰구름낀평평한 골짜기에달이 넘어가네 훌쩍홀로 긴숲밖으로 나오니 돌 뿌리지팡이 소리에자던새가아는척하네 푸른산으로 홀로 은자를찾아와 옷소매로 가을안개털고돌 이끼에앉는다 막걸리에함께 취해달 아래서자자니 학이 펄럭이자솔 이슬이 빈술잔에떨어진다 문충공사암박순(文忠公思庵諱淳,1523~1589)육봉공의 차 남 차남으로 조선중기의 문인 학자로 명종 8년(1553)에 정시문 과에 장원한 뒤 예문관전적을 시작으로 영의정을 15년간 역임 하며약35년간조정에있었다. 그러나 사암공은 외동딸을 두고 있어 사위 이희간(李希幹)군 수의 후손이 300여년 간 외손봉사하다철종때어명으로문간공 의 후 손 이 휴 ( 視休, 1806~1875)로 하여금 봉사손이 되게 하고 돈영부부정의벼슬을제수하였다. 뱚재/실/탐/방 충주박씨찬성공재사 (齋舍) 추원재와일가육문장 (追遠齋) (一家六文章) 추원재전경-광주광역시서구사동(절골) 추원재본재 추원재편액 뱚찬성공제각(祭閣)복원사적기(事蹟記) 사적비 뱚일가육문장(一家六文章)시(詩) 일가육문장편액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