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age

2016년5월31일 화요일 12 (제113호) 기획 숭덕전은신라시조왕의위패를봉안한곳으로세종11년1429년창건된우리나라남한의유일한국전이다.그 럼에도불구하고전국의많은후손과특히지도 자급이라할수있는각급종친회장중일부는시조대왕의영정을모신곳이라고설명하고있으며,선도산성 모사에봉안된성모또한시조왕을낳아주신어 머니로잘못묘사하고있다.만일시조왕을낳아주신어머니라면시조왕의탄강설를부정하고중국에서주장 하는설을그대로받아들이는셈이되어우리 의정체성또한애매모호(曖昧模糊)해지는것으로성손들의이해를돕고자이를재조명해보고자한다.즉숭 덕전은시조대왕의위패를봉안한곳이며, 선 도산의성모는시조대왕을길러준어머니임을명확히밝혀둔다. ▶숭덕전(崇德殿) 1429년(세종 11) 왕명에 의하여 창건되고 봄과 가 을에 향과 축을 하사하여 중사(中祀)의 예로 지낼 것 을정식으로정하였다.1723년(경종3)에숭덕전의현 판을 하사하고 참봉 2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는데, 그뒤참봉은그자손이세습하도록하였다.신라시조 대왕의제향은 신라 2대 남해왕이 시조왕 묘전(廟殿) 을 건립하여 친누이 아노(親妹阿老)에게 명하여 주 제(主祭)가 되어 사시제(四時祭)로 시행케 하였다. 그리고신라21대소지왕(炤智王)9년에 시조성령을 모시는나을신궁을건립하였다.나을(奈乙)이란시조 대왕탄강지로라정(羅井)이라고도한다. 1592년(선조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열읍(列邑) 이함락되자운암박언수공(公)이숭덕전에들러고 별(告別)하고 떠나려하자 갑자기 발이 땅에 붙으므 로 고쳐서 위판(位版)을 모실 것을 고(告)하니 신이 (神異)하게도 발이 떨어져 공(公)은 위험을 무릅쓰 고 인연(因緣) 깊은 선도산 성모사에 이안(移安)하 게 되었다.이로부터 성모사 근처에는 현운(玄雲)이 연쇄(連鎖,사물이나 현상이 사슬처럼 서로 연결되 어 관련을 맺거나 통일체를 이룸)되고 외적이 접근 을 못하게 되어 끝내 안전하게 모실 수 있었다.전란 중에 묘전은 전소(全燒)되었으나 시조대왕의 위판 (位版)만은 안전하게 지켜낸 것으로 이후 월암공은 조정에서 가상히 여겨 숭덕전 참봉의 소임을 맡기니 지성으로 이를 봉행(奉行)하며 천수(天壽)를 다 하 였다.그 후 10년 뒤 선조 34년 관찰사 이시발이 가묘 전(假廟殿)을 지어 위판을 다시 모시고 수호관을 두 어 관리케 하였으며, 그 후 18년 뒤 관찰사 박경신이 본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1723년(경종 3)에 숭덕전 (崇德殿)으로 현액(懸額)하였고 경종(景廟) 癸卯 7 월 22일 사액(賜額)하고 전참봉(殿參奉)을 시치(始 置)하였다.(1723년 초대 전참봉은 朴天根) 1751년 (영조 27)에 승지(承旨) 박필정의 제소(題疏)로 영 조37년에 위판을 ‘新羅始祖王’이라 하였다. 이후 조 선시대는 숭덕전의 제향을 조정에서 관장하였다.숭 덕전 절목은 영조 때 동부승지에게 전교하여 경상도 관찰사에전해진기록이다.이자료는조선시대숭덕 전의수호와제향이관이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 다 . ▶숭덕전절목(崇德殿節目) 영조대왕(英祖大王) 二년 병오(丙午)에 예조 (禮曹)에서 상고하온바 이번 윤허(允許)하신 본조 (本曹)의 계목(啓目)에 숭덕전(崇德殿)의 관계절 목(關係節目)은 숭의전(崇義殿)의 예(例)에 따라 참작마련(參酌磨鍊)하라는 것이므로 후록(後錄) 과 같이 기록 하였사오니, 이에 의하여 거행(擧行) 함이어떠하올지 후록(後錄) ㅡ춘추향사(春秋享祀) 때에 마땅히 해야 할 모 든일은본도(本道)로하여금거행(擧行)케할것 ㅡ각색(各色) 제기(祭器)와 포진(鋪陳)하는 물 품(物品)은 본도(本道)로 하여금 파손(破損)되는 즉시(卽時)로보수할것 ㅡ참봉(參奉) 二名의 매달 급료(給料)는 쌀 十 斗 콩 五斗이며 수호인(守護人)은 매달 쌀 五斗를 본도(本道)에서 계속(繼續)하여 입직(入直)할 때 공궤(供饋)하도록할것 ㅡ전관(殿官)이 유고할 때는 성손(姓孫)으로 가관 (假官)을차출(差出)하여수호(守護)를대행할것 ㅡ수호인(守護人)은 성손(姓孫)이 윤번(輪番) 으로 수호(守護)케 하고 연호(烟戶:名種雜役)와 군역(軍役)을 면제하여 수호(守護)에 전심(專心) 하게할것 ㅡ정전(正殿)및 재사(齋舍)에 훼손(毁損)이 있 을 때는 본부(本府)에서 순영(巡營:도청)에 보고 하여모두수리(修理)할것 ㅡ원당사(院堂寺)는 본토(本土)의 중[僧]을 데 려가다지키게할것 ㅡ수호군(守護軍)은 숭의전(崇義殿)에 七十名을 정원(定員)으로 하였으나 이번 숭덕전(崇德殿)에도 이대로정하면과다(過多)할듯하므로四十名으로감 원(減員)배정(配定)하였으니,미루어서변통할것 ㅡ수복(守僕)六名은전과같이수직(守直)할것 ㅡ신라王의 여러 능(陵)은 참봉(參奉)과 수호인 (守護人)이 겸하여보호(保護)할것 ㅡ복호(復戶:세금을 면제)에 대하여는 본도(本 道)에서 적절(適切)이 정할 것이며 기타(其他) 미 진(未盡)한 조항(條項)은 추후(追後)마련할 것 옹정(擁正)二년 三月十四日(一七二四) 동부승지(同副承旨)臣채성윤(蔡成胤)차지 계(啓)에 의해 윤허(允許)하신 일이 이것이므로 윤허(允許)하신 사연을 봉향거행(奉香擧行)하며 숭의전 등록((崇義殿謄錄)을 베껴 보내니, 상고하 여 거 행 (擧 行 ) 할 일 로 서 로 참 조 (參 照 )하 여 시 행 (施行)하며 수호군(守護軍)을 정한 후에 성명(姓 名)을 책에 기록하여 급속(急速)히 보고하며 식년 (式年:子午卯酉年)마다 도안(道案:守護軍兵籍簿) 을 작성(作成)하여 수정(修正)하여 보고할 것 부 윤(府尹)이거행(擧行)할일 본전(本殿) 향사(享祀) 때 향축(香祝)을 전사관 (典祀官)이 받아 가는바 본전(本殿)에 이미 참봉 (參奉)이 있은즉 전사유생(典祀儒生)이 향축(香 祝)을 받들어 가는 것이 심히 미안하니, 이제부터 는 향축(香祝)을 받들어 가는 것은 참봉(參奉)이 거행(擧行)하고 제물(祭物)은 전사관(典祀官)이 감봉(監封)한 후에 모시고 가는 것을 정식(定式) 으로할것이니,상고해서시행(施行)할것。 국가제사에서 가장 높은 大祀인 종묘나 사직은 좌변으로 12변븡우변으로 12두인 반면에 풍운뇌우 찬실도를 비롯한 중사의 경우 10변븡10두라는 점이 다. 이중에서 빠지는 것은 분자(粉 沁)와 구이( 녈 餌)의 2변과 이식( 酉也食)과 삼식( 쇱食)의 2두이다. 폐 비 (幣 )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펼쳐 있는 양과 돼지의 7가지 신체를 담아놓은 조(俎)를 두고 있으 며, 만약에 소가 들어오면 왼쪽에 조를 가운데로 밀 고소고기를놓는다.나중에시조대왕을대상으로하 는 숭덕전의 경우에는 더 낮은 8변븡8두의 상차림을 하였다.『정조실록』권39정조18년4월27일(계미). 8변 8두의 상차림은 우리 성손 모두가 상고(詳 考)하여재조명해보아야할것을판단된다. ▶선도산성모사 경주시 서악의 선도산(仙桃山) 정상부(해발 390 m)에 위치해 있는 성모사는 신라시대에 창건된 후 고 려 와 조 선 을 거 쳐 오 는 동 안 여 러 번 개 축 되 었 는 데현존하는성모사는1974년경산에거주하는춘강 박재호 참봉 두 아들 성형ㆍ준형 형제가 건축비를 전액자담하여선도산정상부백운간에우뚝하게준 공하였다. 숭덕전 고왕록(攷往錄)에는 조선조 선조 임진왜란 때에 후손 언수(彦秀)가 시조왕의 위판을 모시고선도산성모사에피란하였다는기록이있다. 지금 오릉경내 숭덕전 앞에 운암월성박공휘언수공 덕비가 그것을 입증해 주고 있다. 또 선도산 낙서암 완문(完文)에도 선도산은 성모의 사당과 시조왕의 위판을임시로봉안한유지라하였다.특히지난200 9년 9 월 건 조 한 날 씨 속 에 선 도 산 화 재 로 1.5 h a 산 림 에울창한나무들이모두타버린상황에서도성모사 만큼을비켜가신령스러운곳으로불러지고있다. 그러나 우리 종중의 족보를 보면 대부분 다음과 같이기록하고있다. 『성모사는 신라시조대왕의 모후인 선도성모(仙 桃聖母)를 모신 사당이다.삼국유사 선도성모 수희 불사(隨喜佛事)조에 의하면 신모(神母)는 본시 중 국의 제실의 딸로서 이름은 사소(娑蘇)이다. 일찍 이 신선술을 배워 해동에 강림하여 오랫동안 돌아 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부황(父皇)이 편지를 소리 개발에매어부쳐말하되소리개가머무는곳에집 을 지으라 했다. 사소가 이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으니 선도산(仙桃山)에 날아와 멈추므로 드디어 내왕하여 지선(地仙)이 되었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 또는 서악ㆍ서술(西岳ㆍ西述)이 라고했다.그리고신모는진한에와서저절로잉태 하 여 성 자 (聖 子 ) 를 낳 아 동 국 의 첫 임 금 이 되 시 니 아마 혁거세와 알연 이성(二聖)을 낳은바일 것이 라고 했다. 두 성인의 나이 열세살이 되자, 오봉원 년(서기전57)갑자에 남자는 왕이 되고 여자는 왕 후가 되어 국호를 서라벌 또는 서벌(徐伐)이라고 했다. 라고 되어있다. 』이는 신라시조왕의 탄강설 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탄 강에관한기록을인용한변(辯)을실어본다. 성모사변(聖母祠辯). 1).신라(新羅)시조대왕(始祖大王)탄강(誕降)에 관해서는 시조대왕(始祖大王) 탄강사실(誕降事實) 에서 자세히 밝혀져 있듯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 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에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천강(天降)난생설(卵生說)이정설(定說)이다. (1).삼국사기 권 제1.신라본기 제1.시조 혁거세 거서간조.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 나정 옆에 있는 숲 사이에 말이 무릎을 꿇고 울고 있음을 바라보고 가 보 니 문 득 말 은 볼 수 없 고 다 만 커 다 란 알 하 나 만 있었다.그것을 깨어보니 갓난 아이가 나왔다.데려 다 길렀는데 나이 여남은 살이 되자 기골이 준수하 고 숙성하였다. 육부 사람들은 그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했으므로그를높이받들고존경했는데이때에 [B.C 57] 이르러 [그를] 세워서 임금으로 삼았 다.......( 原文 : .......高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 傍林間.有馬 눠而嘶.則往觀之.忽不見馬.只有大卵. 剖之. 有잤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歲. 岐쳬然 夙成.六部人以其生神異.推尊之.至是立爲君焉.....) (2).삼국유사신라시조혁거세왕조. 전한 지절원년 임자(고본에는 건무원년이라 하 고 또는 건원 3년이라고도 하나 모두 그릇된 것이 다.) 3월 초 1일에 육부의 조상들이 각기 자제들을 데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되 우리가 위 에 백성을 다스릴 군주가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일 하여 제 마음대로 하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치 아니하 랴. 하고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 산 아 래 나 정 곁 에 이 상 스 러 운 기 운 이 전 광 과 같 이 땅에 비치더니 거기에 백마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 하는형상을하고있었다.그곳을찾아가보니한붉 은 알(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이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고 길게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버렸 다.그알을깨어보니모양이단정한아름다운동자 가 나왔다. 경이히 여겨 그 아이를 동천(동천사는 사뇌야 북쪽에있다.)에서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 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일월이 청명한 지라 인하여 그를 혁거세 왕이라 이 름하였다(아마 향언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이라 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설자 (說者)는 이르되 이는 서술성모의 탄생한 것이니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를 찬양하여 신현조방(어 진이를 낳아 나라를 시작하였다.)이란 말이 있는 것도 이 까닭이라 하였다......)( 原文 : ........前漢地節 元年. 壬子(古本云. 建武元年. 又云建元三年等. 皆 誤.). 三月朔. 六部祖. 各率子弟. 俱會於閼川岸上. 議曰. 我輩. 上無君主. 臨理蒸民. 民皆放逸. 自從所 欲. 覓有德人. 爲之君主. 立邦設都乎. 於是乘高南 望. 楊山下蘿井傍. 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눠拜 之狀. 尋괴之. 有一紫卵(一云靑大卵). 馬見人長嘶 上天. 剖其卵得童男. 形儀端美. 驚異之. 浴於東泉 (東泉寺在詞腦野北). 身生光彩. 鳥獸率舞. 天地振 動. 日月淸明. 因名赫居世王.(盖鄕言也. 或作弗矩 內王. 言光明理世也.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讚.仙桃聖母.有娠賢肇邦之語是也........ 2).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저자 김부식(金富軾) 은 신라본기 제1시조 혁거세 거서간 조에서는 신라 (新羅) 시조대왕(始祖大王)의 탄생사실(誕生事實) 을 위 와 같 이 천 강 (天 降) 난 생 설 (卵 生說)로 써 놓 고 신라(新羅)56왕 992년을 편년체(編年體)로 신라본 기(新羅本紀)를 다 쓴 뒤 자신의 감회를 적은 논왈 (論曰) 조에 와서는 이 천강(天降) 난생설(卵生說) 을부정하면서다음과같이기록하고 있다. (1).삼국사기권제12.논왈(論曰)조. 신라의 박씨븡석씨는 모두 알에서 나왔고,김씨는 황금 궤 속에 들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며, 혹은황금수레를타고왔다고하니이는너무기괴 하여 믿을 수 없으나, 세속이 서로 전하여 사실이 라고 한다. ①정화(政和) 연간에 우리 조정에서는 상서(尙書)이자량(李資諒)을 송나라에 보내어 조 공했을 때, 신(臣) 부식(富軾)은 문필의 임무를 띠 고 같이 가서 우신관(佑神館)에 나아가 어떤 집에 여인선인상(仙人像)을모셔둔것을보았다. 사신을 접대하던 학사(學士)왕보(王 빪)는 말했 다. “이것은 귀국(貴國)의 신인데 공들은 이를 아 십니까?” 마침내 말했다. “옛날 어떤 제왕의 집 딸 이 있었는데,남편이 없는데도 아이를 배어 남에게 의심을 받게 되자, 이에 바다를 건너 진한에 이르 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으며, 제 왕의 딸은 지상의 신선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 山)에있다는데,이것은그선인의상입니다.” 부식(富軾)은 또 송나라의 사신 왕 양(王襄)이 지은 동신성모(東神聖母)에게 제사 드리는 글에, ‘현인을 낳아 나라를 처음 세웠다.’ 는 귀절이 있는 것을 보고 그 제사 동신(東神)이 곧 선도산의 신성 (神聖)임을 알았다.그러나 그 아들이 어느 때 임금 노릇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原文 : 新羅朴氏. 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櫃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不可信.然世俗相傳.爲之實事.政和中.我 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 以文翰之任輔 行.詣佑神館.見一堂設女仙像.館伴學士王빪曰.此 貴國之神.公等知之乎.遂言曰.古有帝室之女.不夫 而孕.爲人所疑.乃泛海抵辰韓生子.爲海東始主.帝 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 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 則仙桃山神聖者也.然而不知其子.王於何時........) (2). 위에서 살펴본 삼국유사 저자가 “.......인하여 그를 혁거세 왕이라 이름 하였다.(......설자(說者) 는 이르되 서술성모의 탄생한 것이니 중국 사람들 이 선도성모를 찬양하여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시작하였다.’ 라는 말이 있는 것도 이 까닭이라 하 였다.).”하였는데, 가. 이 ( ) 안의 설자(說者)는 삼국사기 저자 김 부식(金富軾)이 논왈(論曰) 조에서 말한 “송나라 의 사신 왕양(王襄)이 지은 동신성모(東神聖母)에 게 제 사 드 리 는 글 에 , ‘현 인 을 낳 아 나 라 를 처 음 세 웠 다 .’ 는 귀 절 이 있 는 것 을 보 고 그 제 사 동 신 (東 神)이 곧 선도산의 신성(神聖)임을 알았다.” 라는 글을옮겨놓은것이다. 나. 그렇다면,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 ①정화연 간(政和年間)에 송나라에 사신을 따라 갔을 때 ...... “우신관(佑神館)에 나아가 어떤 집에 여인 선인상 (仙人像)을 모셔 둔 것을 보았다. 사신을 접대하던 학사(學士) 왕 보(王 빪)가 ‘이것은 귀국(貴國)의 신인데공들은이를아십니까?마침내말했다.옛날 어떤 제왕의 집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는데도 아 이를 배어 남에게 의심을 받게 되자 이에 바다를 건 너 진한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으며,제왕의 딸은 지상의 신선이 되어 길이 선 도산(仙桃山)에 있다는데이것은그선인의상입니 다.’...또송나라의사신왕 양(王襄)이지은동신성 모(東神聖母)에게 제사 드리는 글에, ‘현인을 낳아 나 라 를 처 음 으 로 세 웠 다 .’ 는 구 절 이 있 는 것 을 보 고그제사동신(東神)이 곧선도산의신성(神聖)임 을 알 았 다 . 그 러 나 그 아 들 이 어 느 때 임 금 노 릇 을 한 것 인 지 는 알 수 없 다 .”....... 라 고 한 , 삼국사기 저 자의이말에과연신빙성이있다할 수있을까? 3). 먼저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金富軾)이 사신 을 따라 송나라에 갔다는 ①정화연간(政和年間)은 송(宋)나라 휘종(徽宗)의 연호(年號)로 A.D 1111 년에서 1117년까지를 말하며 저자 김부식(金富軾) 은 이때 송나라에 사신을 따라 들어갔고 어떤 집에 서 여인(女人)선인상(仙人像)을 보았으며 사신을 접대하던 학사(學士) 왕 보(王 빪)는 ......“옛날 어 떤 제왕의 집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는데도 아 이를 배어 남에게 의심을 받게 되자, 이에 바다를 건너 진한에 이르러 아들을 낳으니, 해동의 첫 임 금이 되었으며 제왕의 딸은 지상의 신선이 되어 길 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다는데 이것은 그 선인의 상입니다.” 라고 한, 학사(學士) 왕 보(王 빪)의 이 말을과연진실이라할수있을까? 4).왜냐하면,삼국사기삼국유사에의하면신라(新 羅)시조대왕(始祖大王)께서는B.C57년.전한(前漢) 지절원년(地節元年) 임자(壬子)에 탄강(誕降)하셨 으니, 김부식이 말한 정화연간(A.D 1111-1117년)과 는 약 1200년 전의 일이다. 그리고 전한(前漢)과 송 (宋)나라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그 사이 중국은 왕조(王朝)가여러차례바뀌었는데,무엇때문에 (1). 송나라 우신관(佑神館) 어떤 집에 여인 선 인상(仙人像)을모셔두었겠으며, ( 2 ). ‘옛 날 어 떤 제 왕 의 집 딸 이 있 었 는 데 남 편 이 없는데도 아이를 배어 남에게 의심을 받게 되자 이 에바다를건너진한에이르러아들을낳으니해동 의 첫 임금이 되었으며, 제왕의 딸은 지상의 신선 이 되어 길이 선도산(仙桃山)에 있다는데 이것은 그 선인의 상입니다.’ 라고 하였으나, 전한(前漢) 이라밝히지않았으며, (3). 김부식은 “...또 송나라의 사신 왕 양(王 襄)이 지은 동신성모(東神聖母)에게 제사 드리는 글에,‘현 인을 낳아 나라를 처음으로 세웠다.’ 는 구절이 있는 것을보고그제사동신(東神)이곧선도산의신성(神 聖)임을 알았다. 그러나 그 아들이 어느 때 임금 노릇 을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라고 한, 김부식의 ‘동신 (東神)이 곧 선도산의 신성(神聖)임을 알았으나, 그 아들이어느때임금노릇을한것인지는알수없다.’ 이말을과연믿을만한말이라하겠는가? (4). 왜냐하면, 김부식은 ‘현인을 낳아 나라를 처 음으로 세웠다.’는 구절에서 동신(東神)이 곧 선도 산(仙桃山)의 신성(神聖)임은 알았으나, 그분이 낳아 나라를 처음으로 세운 현인은 누구인지 모른 다는뜻인데이것이과연믿을수있는말인가? 5).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이 논왈 조에서 밝힌 정 화연간 운운한 부분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시 대적으로나 서술한 내용이나 도저히 신빙성 있는 역사적사실을소개했다고볼수없다.따라서삼국 사기 권 제12. 논왈 조에 그와 같은 사실을 소개한 바있다는것을참고로알고있으면족할것이다. /박상섭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숭덕전과 성모사 선조 유지를찾아븣 오릉원전경. 숭덕전전경. 성모사제향광경(음3.10) 숭덕전춘향진설(가운데위패가보인다).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