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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양 장병준 공은 1893년 6월 10일 전라남도 목포시 양동에서 인동 장진섭공과 하동정씨의 맏이로 태어나셨다. 일제말기 신안군에서 유일하게 창씨개명을 하지않는 가문이라는 기록이 말하듯 공은 태중에서부터 조국광복과 민족자존의 소명을 안고 있었던 셈이다. 공은 일본에 유학해 일본대 법과를 졸업하셨다. 맘만 먹으면 입신과 영달의 길이 열릴 유학 길이었다. 그러나 공은 분연히 가시밭길을 택하셨다. 공이 유학 후 고향에 돌아왔을때 이땅에 요원의 불길처럼 일렁이고 있던 3.1운동부터가 공을 그냥두지 않았다. 공은 3월 8일 무안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셨다. 광무황제 안장식을 거행한다며 장례때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서는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도 벌이셨다. 이 때문에 일경의 체포령이 내리자 공은 그해 4월 상해로 망명하셨다. 공은 곧바로 임시 의정원 전남대표로 선출되고 재정부차장으로 활약하셨다. 공의 뜨거운 열혈 광복운동 앞에서는 대륙도 좁았다. 공은 남북 만주와 시베리아에 흩어져있던 광복단체 지도자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이들을 설득한 끝에 모두 상해임정솔하로 통합하는 큰 공을 세우셨다. 부민단 중광단 한족회 신흥회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대한독립단 광복군일영... 당시 공에게 설득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