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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1907년 9월 24일과 10월 12일에 산남의진 본진이 흥해지역을 공격하여 왜병을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며 왜병분파소 우편소 서기청 등 주요 건물을 불사르고 작전을 성공시킬 때 선생은 사전에 이 지역의 정세 정보를 수집하여 진중에 연락 보고하고 작전을 협의 지원하였다. 삼남의진 2대 대장 정환직이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영천에서 총살당한 후 3대장으로 흥해 출신 최세윤이 추대됨에 따라 선생은 학자와 교육자로서 긴밀한 유대와 교류를 가진 그와 빈번히 접촉하여 의병활동에 대해 논의하며 장기남 동대산에 주둔하여 유격전을 펴고 있는 최대장을 진후에서 적극 지원하였다. 최대장이 체포되어 옥사함에 따라 산남의진은 곤경에 처하고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본군의 본격화된 조선의병 소탕작전으로 대부분의 산남의진 의병이 전사 체포 피신 만주로 망명함에 따라 선생도 일본 경찰의 주목과 감시를 피하려고 곡강 흥안동에서 현재의 흥해 매산동으로 이주하여 은둔하면서 지역 자제들을 교육하고 은밀히 과거의 동지들과 연락하면서 지하활동을 계속하였다. 1920년 3월 라 기 산남의진의 간부였고 선생과는 동향 동지인 정순기 정래의 정호용과 매산동 선생의 본가에서 은밀히 접촉하여 잦은 모임을 갖고 영남지역 산남의진의 재건과 구국항일운동의 계속적인 전개 또한 순국의병추모사업 등 지하항일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참동계라는 위장명칭을 걸고 구체적인 조직과 활동방법을 계획하며 선생이 참동계 서문을 작정한 후 흥해 영천 등 영남일대를 비밀리에 순회하며 취지를 알리고 동지를 규합하며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동향인의 밀고로 왜경의 습격을 받아 정순기는 도피하였고 선생과 정래익 정호용은 체포 구속되었다. 이때 그간의 지하활동자로써 참동계 관련문서 일체를 체포 직전에 급히 소각시킴으써 증거를 없애버렸다. 이 참동계 주동자는 당시 일제 전복을 목적으로한 지하단체 결성 및 활동에 해당하는 대정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이었다. 구속된 선생 등은 1927년 6월에서 10월까지 5개월간 영천경찰서 포항경찰서 마지막으로는 경주검사국에서 일본경찰의 강력한 수사 자백 강요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당시 제령 제7호는 3.1운동에 대한 강력한 대응조치인 특별법에 해당됨으로 위반자는 정치범으로 중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으나 다행히 체포직전 서류를 태워버림으로서 일본 당국은 증거확보를 위한 갖은 방법을 다했으나 관련자들이 끝까지 자백을 않고 당시 민심 소요와 사건의 확대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해 할 수 없이 참동계 주동자들을 기소 중지로 석방시키게 되었다. 1927년 10월 24일 경주검사국에서 풀려난 선생에 대한 일본경찰의 감시가 강화되었고 그 간의 수사과정에서의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