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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손에 안은한 군자가 태어났으니 성균관진사 이조참판 묵와공 우 이다. 공은 초일한 재질을 타고나 진작 5경3사를 통람하여 학문이 크게 성취하였다. 그 학문적 조예와 식견이 입신출세하기에 넉넉했으나 공은 영달을 탐하지 아니하고 조용히 후진을 기르면서 수분의 일생을 보냈다. 그 음덕의 갚음이었던지 5대 독신으로 이어져 온 고족한 가계에 6형제를 낳아 융성한 문호를 열었으니 장남은 휘 병구 자 사성 호 소남이니 성균관진사요 차남은 휘 병래 자 순칠 호 단애요 3남은 휘 병은 자 자상 호 미남이요 4남은 휘 병주 자 성관 호 산석이니 가선대부 돈녕부동지사요 5남은 휘 병효 자 주경 호 화하니 증 동몽교관조태대부요 6남은 휘 병민 자 계민 호 병헌이다. 준수한 6형제가 처마를 연하여 살면서 우애를 나누고 학문을 강론하여 당시 경향에서 그 성황을 칭송하였거니와 그 후손이 또 한번 성하여 울연한 화양동 윤문의 취락을 이루었다. 그러나 세도의 변화에 따라 젊은 세대들이 모두 도시로 진출하게 되어 각처에 산재한 선영을 수호하고 철따라 올리는 향화를 지속하기가 어려워졌다. 이 시대적 변천에 의해 생겨난 것이 신형 묘원의 건조이다. 묵와공의 후손들도 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문의를 거쳐 건조한 것이 이 이현영원이다. 이현영원은 합천군 묘산면 화양리 98번지에 옛 제숙소였던 이현제의 옛터에 2천여평 한옥으로 축조되었다. 이 건물에는 혼령 1800위를 안치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으니 앞으로 백여년 이상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의 건조를 위해서 묵와공 후손 백여 가구가 150만원씩을 갹출하고 부족액은 성금으로 충당하였다. 이제 묵와공 후손으로서 유명을 달리한 혼령들이 모두 한 자리에 길이 안주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살아있는 후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