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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야 할 것 같다. 최명수 선생은 충북 청원(淸原) 사람이다. 1907년 충남 목천(木川)교회 전도사로서 청소년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다가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李始榮)·김동삼(金東三)과 함께 경학사(耕學社)와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하여 재만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에 참여하였다. 1919년에는 한족회(韓族會)에 참가하여 헌병과장, 검무감 등으로 친일분자 처단에 앞장섰으며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중앙의회 의장직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1922년에는 재만독립운동단체가 통합되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조직하게 되자 검무국장(檢務局長)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표로서 정의부(正義府)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정의부가 조직된 후에는 검무감(檢務監)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8년 8월에는 3부(正義府·參議府·新民府)통합 운동이 일어나게 됨에 따라 정의부 제5회 정기중앙의회가 개최되었는데 민족유일당재만촉성회(民族唯一黨在滿促成會)를 지지하는 중앙집행위원 이청천(李靑天)·이종건(李鍾乾)·김원식(金元植)·이규동(李圭東)·김상덕(金尙德)·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그는 시국문제(時局問題) 토의중 혼란이 일어나자 퇴장하게 됨으로써 3부통합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는 그후 1928년 국민부(國民府)가 조직되자 간부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일제가 만주를 석권하게 됨에 따라 이청천(李靑天)과 함께 상해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 2월 일본영사관경찰에 체포되어 평안환(平安丸)편으로 인천을 거쳐 신의주로 압송되었으며, 1935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