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page

96 | 도 당진과 서산 등지를 배로 이동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는 1908년 초에는 충청, 경기지역의 연합의병인 13진창의소를 조직하고 총대장에 추대되었 다. 그러나 7월 19일 성환수비대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최구현 (1866~1906)은 면천의 매염리 출신 의병장이다. 무과 출신인 그는 1905 년 11월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1906년 4월 기지시에 병오창의도소를 설치 하였다. 그는 격문을 발표하고‘창의영도장’에 추대되어 의병을 지휘하고 5월 10일 면천성을 공격하였다. 치열한 공방전을 수행하고 소난지도로 들 어갔으나 추격해 온 일본경찰대의 대대적인 기습공격을 받고 체포되었다. 충남의병은 전 기간에 걸쳐서 투쟁성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이것은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나 소난지도 의병의 불굴의 투쟁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충남지역의 의병들은 승패를 떠나 투철한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전 기간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투쟁하였다. 그리고 국망 이후에는 국내에서는 독립의군부 또는 대한광복회와 같은 무장단체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국외 에서는 만주에서의 무관학교나 무장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등 그들이 전개한 민족독립운동은 크게 평가된다. 충남지역의 애국계몽운동은 그다지 활발한 편이 못된다. 이것은 충남지 역이 보수적인 유생층이 두터웠던 때문으로 보인다. 대한자강회는 전국에 26개소의 지회를 설치하였는데 충남에는 직산 1개소에 지회가 있을 뿐이 었다. 국채보상운동은 활발히 전개된 편이다. 충남지방에서는 1907년 3월 부터 20개소에 달하는 국채보상금 수합소가 설치되어 활동하였다. 이 단 체의 주도자는 전현직 관리와, 자산가, 종교인, 교사, 학생 등 주로 지방의 유지층이었다. 참여 계층에는 노동자, 유생층, 상인층, 심지어는 아동들도 있었다. 종교계 학교의 학생이나 교인들의 참여도 있었으며, 공주의 갑사 나 동학사의 승려들의 의연도 이어졌다. 광문사의 사장으로 국채보상운동 을 주도한 김광제는 바로 보령 출신이다. 그는 1907년 대구에서 출판사인 광문사(廣文社)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부사장 서상돈(徐相敦)과 함께‘국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