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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 송병직·안병찬은 징역 3년, 이설은 장60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임금의 특지에 따라 전원 사면 석방, 귀향하였다. 홍주일대의 사민들은 1906년 3월에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것에 분 개하여 의병을 재기하였다. 안병찬과 박창로ㆍ이세영은 3월 11일(음, 2월 17일) 정산의 천장리에 거주하는 민종식을 찾아가 의병대장 직에 오를 것 을 청하였다. 민종식은 3월 15일(음, 2월 21일) 이를 받아들여 의병장에 올 랐다. 민종식은 광수장터 (현, 예산군 광시면)로 진군하여 편제를 정하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렸다. 이들은 이튿날 바로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저항에 오히려 대장소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다음날 의진은 광시장터로 회군하여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화성의 합천에 진을 쳤다. 다음 날인 3월 17일(음, 2월 23일) 오전 5시 의진은 공주에서 파견한 관군과 일 본군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 등이 체포되고 말았다. 합천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은 각지를 잠행하다가 이용규가 초모한 의병을 중심으로 부여의 지 치에서 의병을 재기하였다. 의병은 남포전투를 승리한 후 5월 19일 홍주성 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일제는 5월 20일부터 공주의 고문부 경찰과 수 원의 헌병부대를 증파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의병은 굳건한 성 벽을 이용하여 이들의 총격에 대응하였다. 몇 차례의 일본경찰과 헌병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히루부미는 주차 군 사령관에게 군대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는 5 월 27일 보병 2개 중대를 홍주에 파견하여 경찰과 헌병 그리고 진위대에 게 협조토록 훈령하였다. 이에 보병 제 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 좌 지휘 하에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 가 합세하여 30일 홍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다나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1일 오전 2시 반 공격을 개시하여 3시경에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 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문 안으로 진입하였다. 의병은 치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