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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3 권하였다. 그는 이승우의 거절을 받고 11월 27일 홍주향교 전교 안병찬을 만나 의병을 협의하였다. 이미 부친 안창식과 함께 의병 준비를 하던 안병 찬은 김복한과 의기투합되었다. 김복한은 이봉학, 이상린과 청양군수 정인 희에게도 글을 보내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11월 28일 청양의 유생들은 화성에서 향회를 개최하고 의병 봉기를 결의 하였다. 안병찬과 채광묵은 180여 명의 민병을 인솔하여 홍주성에 입성하 였다. 12월 1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에서 이봉학·이세영·김정하 등 수 백 명이 성안에 들어와 숨었다. 12월 2일, 안병찬의 척숙 박창로가 사민 수백 명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가 청양군수 정인희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 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였다. 김복한은 12월 2일 민병이 관아에 집결하였을 때 관찰사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경무사 강호선과 참서관 함 인학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관찰사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고 결국 거의에 참여할 것을 승복하였다. 다음 날 홍주성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이 대장에 추대되었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각 고을 대표들에게 집을 순회하며 의병을 초모하 게 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 가 배반하고 말았다. 그는 김복한과 이설 등 총 23명을 구금하였다. 12월 7일 서울에서 신우균이 군사 250명을 이끌고 내려와 김복한 등으로부터 진술서를 받았다. 12월 30일 수감자 23명은 결박당한 채 서울로 압송되었 다. 압송되어가던 이들이 1896년 1월 1일 신례원에 도착하였을 때 이승우 는 아관파천과 김홍집의 처형 소식을 듣고 이들을 다시 홍주감옥에 구금시 켰다. 집권 세력의 붕괴에 사태의 추이를 주시하고자 한 때문이었다. 김복 한·이설·홍건·안병찬·송병직·이상린(이상 홍주6의사) 이외의 17명 은 모두 무죄 석방되었다. 김복한 등 6명은 법부의 훈령에 따라 1월 17일 서울로 압송하여 한성재판소에 이송되었다. 이들은 2월 23일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의 공초를 받고 25일 김복한은 유배 10년, 홍건·이상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