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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 22) 李喆承,「衛正斥邪論」,『直菴集』권5, 산록. 라면서 유학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반면에 갑오경장 이후의 서양 학문 인 신학(新學)은 선왕의 전장문물을 없애고 서양의 음사추패(陰邪醜悖)한 설로써 민중을 현혹하여 인간의 심성과 윤리를 변환시켜 천리를 거역한다 고 비판하였다. 그는 철저한 척사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그의「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서 사람에게‘邪’와‘正’이 있는 것은 하늘에 陰陽이 있어 이것들이 병립함 을 용납할 수 없는 것과 같다. 正이 소멸하면 邪가 장성하고 邪가 소멸하 면 正이 장성하니 그 消와 長에 따라 人事의 시비와 득실이 판별되고, 治 亂興衰가 관계된다. 22) 라고 하여 위정과 척사는 서로 병립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여 양자 간의 병존과 타협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는 이어서 위정척사는 군자의 큰 의리이니 이 의리가 있으면 인도(人道)가 있고, 이 의리가 망하면 인도가 식으니 가히 경계하고 두려워 하지 않겠는가 (『직암집』). 라고 위정척사는 곧 군자의 의리임을 강조하였다. 이로 보아 그는 존화양 이론을 철저히 견지한 척사계열의 유학자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또한 화서학파의 문인으로서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학설과 언행 에 대하여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는 전우가 의병에 참여하는 것을 기피하 고 오히려 화서학파를 비판한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제자인 남천우에게 보낸‘답남성지(答南誠之)’(1921)에서 자신이 당진의 우현(牛峴)에 거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