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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 신경춘(申敬春)은 당진 출신으로 독자적인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부하 30여명을 이끌고 당진, 서산, 태안, 덕산부근에서 활동한 의병장이다. 그 는 1908년 12월 15일 저녁 10시경에 해미의 염솔면 성산리 박응진 외 2명 집에, 또 다음 날 저녁 11시 30분경에는 해미의 이도면장 유진오 집에 들 어갔던 것이 일본 경찰에 탐지되었다. 서산 지역으로 이진하여 활동하던 중에 그의 부하인 윤성팔이 서산 동음암면 동음암리에서 체포되었다. 윤성 팔은 경기도 부평군 수탐면 오류동 출신으로 서산군 성연면 마명리로 이주 하여 농사를 짓다가 신경춘 의병에 참가한 것이다. 신경춘 의병의 부대원 인 박선명도 체포되었는데 그는 경기도 남양군 수산면 사강동 출신으로 신 경춘 의병에 들어가 대부도에서 활동하였다. 1908년 8월에는 20여명이 당진군 도리도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전투를 벌였으며, 1909년 10월 28일 에는 남양군 정면 사강동 등지에서 활동했다. 박선명은 체포되어 1909년 12월 7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 신경춘 의병의 활동으로 도호의숙은 운영되기 힘들었던 것 같다. 1908년 음력 7월에 신경춘 의병이 도이리까지 들어와서 군자금을 요구했던 것 같 다. 이 시기 의병의 활동은 일본군의 대규모 탄압으로 극히 위축되어 있을 때였다. 대부분 소규모의 부대로 이동하면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의 항전을 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군자는 주로 주민들의 지원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때로는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하는 경우가 생겼다. 신 경춘 의병대 역시 생계를 위하여 도이리까지 들어와 비교적 부유한 집에 들어가 군자금을 요구하였는데, 이때 도호의숙의 훈장인 정기호가 위협을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여튼 도호의숙은 의병의 활동으로 인하여 정지되 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해 음력 10월에 신경춘의병이 일본군 에 의해 진압되어 의숙은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그런데 그해 11월 훈장 정기호는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말아 의숙은 몇 개월간 또 다시 문을 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