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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 18) 유인석, 『의암집』(의암 유인석(柳麟錫)이 어취선에게 보낸 편지, 1912년 3월 12일). 정미년(융희원년) 환성재 어취선을 청주에 찾아갔다. 환성은 성재 문하의 고제이다. 건암 민정식이 오산으로부터 추계에 달려 와서 곡을 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그의 학문이 밝고 덕이 갖추어 있어 가 히 사표가 될 수 있음을 말하였다. 드디어 종중에서 의논하여 主事 鍾祐를 보내어 교수로 섬길 것을 말하였으나 함께 돌아오지 못하였다. 민정식이 유진하의 장례에 참석하였다가 도이리에 들려 도호의숙의 교수 로 어취선을 추천한 것이다. 그리고 어취선에 대하여 성재 유중교의 고제 로 학덕이 갖추어져 사표가 될 만하다고 한 것이다. 종중에서 종우를 청주 까지 보내어 모셔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취선은 성재 유중교의 문인으로 화서학파의 유학자이다. 그는 1895년 을미의병 시에 춘천의병진에 군자금을 내었으며, 민족 지사들과 교유하며 시국을 논하였다. 결국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20여명의 가족을 이끌 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어취선은 유인석이 망명해 있던 신빈현 평정산진 의 난천자 마을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종형인 어경선과 독립운동 가 백삼규, 습재 이소응, 유의석 등과 항일운동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유 인석이 그에게 보낸 편지가『의암집』에 살려 있는데, 이를 소개하면 다음 과 같다. 18) 나라 일을 두고 통곡하니 대저 다시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당신이 집안을 이끌고 요동에 들어오겠다니 處義를 잘 하는 데 감격됩니다. 본국 에서 왜놈의 신민이 되는 것은 극히 불가한 일이니 다른 나라로 망명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용기와 정의를 불러 일으키지 않았다면 어 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또 다소의 사우가 서로 모이게 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