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page

76 | 추천하여 제천의병의 소모장 등으로 활약하게 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 다. 그는 1899년에는 서산시 운산면 거성리 추계마을로 이사하여 후학 을 양성하였으며, 김복한과 김상덕 등 인근의 유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척 사론을 펼쳤다. 1901년에는 서령향약을 중수하는 등 향풍의 진작에도 힘 썼다. 도호의숙은 1906년 2월 유진하를 훈장으로 모셔오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학생 수도 늘어나 그해 서당이 비좁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해 3월에는 의숙의 남쪽으로 바깥채를 낙성했다. 이로써 수십 명을 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도호의숙에서는 유진하를 훈장으로 초빙하고『대학』과『소 학』한질을 구입하였으며, 학생들에게 이항로의 문집인『화서집』한질을 초하게 하고『송자대전』도 구입하였다. 유진하는 서산에 정착하여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는데, 대표적인 문인으 로는 이철승·민태직·심원성·정재학·정재화·민태용·박영원·이순 일·이인손·한후택 등이 있다. 의령 남씨 중에서 유진하의 강학을 들은 이로는 남정직·남정태·남상 익·남상범·남상락·남상집·남상돈 등이 있다. 그러나 유진하는 얼마안가 1906년 8월에 역질로 세상을 떴다. 갑자기 선 생이 죽자 의숙은 강학을 맡을 이가 없게 되어 그 후 1년 여간 문을 닫게 되었으며, 학생들은 각자 집에서 학업을 익혔다. 유진하의 사후에 건암(健菴) 민정식(閔正植)의 추천으로 유중교의 문인인 환성재(喚醒齋) 어취선(魚聚善)을 청주로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으 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b도호의숙사지c에 의하면 어취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17) 17) 남상혁, b도호의숙사지c, 『극재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