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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 는 홍주의병의 군사장과 참모장으로 활약하였다. 홍주성 전투에서 체포된 그는 10년 유배형을 받고 다시 고군산도에 유배되었다. 석방된 후에는 보 령 천북면 용천으로 이사하여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강당의 옆에 임금을 사 모하는 마음으로 천일대(天一臺)를 쌓고 매일 서울을 향해 재배하였다. 2. 도호의숙 설립 도호의숙은 원래‘종숙(宗塾)’이라 하여 가문내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세워졌고 종숙이 발전하면서 여타 문중 자제들도 교육을 시키기에 이 르러‘의숙’으로 발전되었다. 도호종숙이 처음 문을 연 것은 21세 종손인 남석구(南錫龜, 1798~1868)와 그의 조카 승지 남보영(南普永, 1826~1868), 그리고 유학자 남계옥(南啓沃, 1828~1867)등 3인에 의하여 1860년대 초에 설립되었으며, 학량계(學量 )라는 일종의 운영 재단을 설 치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이 종숙은 남보영의 아들 청파공(靑坡公) 규희(圭熙, 1852~1902) 에 의하여 도이리 풍곡(신나무 골) 마을에 집을 한 채 구입하여 정식 문을 열게 되었는데 그 해가 신축년, 1901년이었다. 이로서 도호의숙은 본격적 인 학당으로 발전하였다. 의령 남씨 종중에서는 수십 두락의 전답을 제공 하여 운영비에 충당하게 하였으며, 학당의 규약을 정하고, 원활한 운영을 위해 강계(講契)까지 설치하였다. 청파공 남규희가 죽은 뒤에는 백파(栢坡) 남택희(南宅熙)가 무과에 급제 하고도 벼슬 길을 마다하고 자질들의 교육을 위하여 서당을 넓히는 등 의 숙의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이후 도호의숙은 이성구(李成九)을 초빙하여 강학을 담당하게 하였다. 하 지만 1905년에는 이성구가 이사하는 바람에 1906년 존재(存齋) 유진하(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