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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1 던 관료유생이며, 동시에 1894년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이 가해지자 관직 을 사직하고 홍주로 낙향하여 홍주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기도 하다. 그는 을사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919년 파리장서사건으로 옥고를 겪은 민족지사였다. 이설 역시 문과에 급제한 후 승지가 되어 고종 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1894년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甲 午變亂) 등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인 홍주부 결성 군으로 낙향하였으며, 다음해 홍주의병에 참여하였다. 그의 학문적 성격 역시 스승인 이돈필의 영향을 받아‘척이단적 화이론’과 절의론이 강하게 나타난다. 1881년 신사척사운동때 남산에서 봉화 상소를 올린 백낙관(白樂寬, 1846~1883, 호: 秋江)도 남당학파로 분류할 수 있다. 남당학파의 척사운 동은 백낙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할 정도로 그의 상소운동은 치열하였다. 그에게 학문적 영향을 준 인물로 보령의 백사형(白師亨)이 있는데, 그 역시 정혁신의 문인이다. 김상정(金商玎)은 한원진과는 동문인 김한록의 현손으로 가학으로 호론 을 전수 받았다. 그는 선대의 학문을 철저히 계승하였으며 민족적 위기가 닥침에 따라 척이단의 이념을 실천하였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이후에는 산 속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였으며, 1918년 고종의‘시변(弑 變)’을 당하여 상복을 입고 살면서 복수할 것을 천명하면서 일체의 세금을 내지 않았다. 총독을 꾸짖는 혈서를 발송하였으며, ‘왜놈’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 왼쪽 귀를 스스로 자를 정도로 민족 자존의식에 철저한 배일주의자 였다. 김상정의 종형인 김상덕(金商悳, 호: 韋觀) 역시 한원진을 사숙하였다. 그 는 보령 주포면 보령리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1896년 2월 이승우의 후 임으로 홍주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홍주의병 19명을 석방시켰다. 이로 인 해 그는 3년 징역형을 받고 고군산도에 유배되었으며, 풀려난 후 1906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