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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 이설(李 ), 1850-1906, 본: 연안, 호: 復菴, 자: 舜命)은 인조반정을 일 으킨 정사공신 이귀(李貴)의 10대 후손이다. 그는 1888년에 알성시에, 그 다음해는 전시에 급제하여 1894년 승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1894년 3월 의 변복령, 6월의 갑오변란 등 일련의 개화정책과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사직소를 올리고 고향인 홍주부 결성군으로 낙향하였으며, 다음해 홍주의 병에 참여하였다. 이설은 이돈필로부터 율곡에서 우암 송시열을 거쳐 한원 진으로 내려오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한 유학자라 할 것이다. 이설은 한원진의 주요사상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에 영향받은 바 크다. 이에 따라서 그의 학문적 성격은‘척이단적 화이론’과 절의론이 강하게 나타났 다. 이설이 한원진을 존신하게 된 데에는 그의 조상 중에 신재(新齋) 이도중 (李度中)의 영향도 컸다. 이도중은 한원진의 제자로, 한원진 사후 1823년 연기의 유림들이 고정사(高亭祠)를 짓고 한원진을 배향할 때b고정사기c를 지어 공자와 주자의 맥이 동방에 이르러“율곡 사계 우암 한수로 내려와 그 적전을 남당이 이어받았음”을 밝혔다. 그는 한원진의 학문을 철저히 존 숭하여 사후에 남당영당에 배향되었다. 이에 따라서 이설은 개인적으로 한 원진의 사숙 문인임을 자처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사숙 문인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홍주의병에 참여하여 1개월 이상의 옥 고를 치르고 1896년 2월 사면, 석방되어 고향에 돌아온 그는 맨 먼저 한원 진의 묘소를 참배하고 제문을 바치고 있다. 그리고 이 제문에서 그는 한원 진이 말한 유석(儒釋)과 화이(華夷)의 분별이 없어졌음을 통탄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한원진의 사상은 이설의 사상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니, 김복 한이 이설을“율곡과 남당의 충신”이라 함은 적절한 평이라 하겠다. 이설 의 문인 중에 이길성(李吉性)은 홍성군 구항면에서 3·1운동을 주도하여 옥고를 치른 것으로 유명하다. 이와 같이 김복한은 문과에 급제한 후 동부승지로 고종을 측근에서 모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