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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 상헌(金尙憲) 형제의 절의론이 가학으로 이어진 바도 있으나, 스승인 이돈 필을 통하여 전해진 한원진의 호론적 학풍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그 는 이러한 호론적 학풍을 자신만이 아니라 내종형인 이설과 함께 이를 철 저히 계승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훈도를 받은 인근의 유생들 역시 그의 영향을 받아 한원진의 학통을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여 스스로가‘당 문(塘門)’이라 호칭하기까지 하였다. 김복한은 한원진을 주자에 버금가는 선생으로 존모하였으며, 한원진이야 말로 율곡과 우암을 잇는 군자임을 역설하였다. 그는 임한주·임승주 등과 함께 1897년 4월에 한원진의 묘에 참배하고 고유문을 바쳤다. 1901년에는 이설·유호근·조구원·김용제등과b남당연보c를 간행하였으며 한원진의 묘비가 없어 누구의 묘인지 알 수 없다고 인근의 유생들에게 글을 띄워 묘 비 건립을 위한 의연금을 모아 비석을 세웠다. 이때 그는 임한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들을 한원진의 사숙문인으로 자처하며 한원진의 학문적 위 치를‘율곡과 우암이 장애가 되나 주자이후 한분 뿐이다.’또는 1921년 한 원진의 묘에 바친‘고묘문(告墓文)’에서“성리설을 밝힌 공이 공자·주자 와 더불어 우주간 3인이라 할 것이다”라고 밝힌 사실에서 김복한의 한원진 존숭의 정도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이와같은 김복한의 학문적 경향에 대하여 그의 고향 후배이면서 홍주의 병 동지이기도 한 임한주(林翰周)는 김복한이 1895년 이후 30년간‘위정 척사론’을 높이 세웠다고 하면서“공은 한번 남당의 책을 보면 보던 것을 버리고, 일단 존신함이 마치 친히 그 문하에서 수업을 받은 자와 같았다.” 라 평하고 있다. 이러한 후배와 제자들의 태도에 대하여 김복한은“당옹 (塘翁)의 지극한 가르침은 어찌 우리 당의 행복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여 남당학파임을 자부하고 있다. 김복한의 문인으로는 그의 아들인 은동·노 동·명동 3형제와 전용욱·신해철·이철승·김택·김좌진·임경호·황 일성·남상혁 등이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