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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노정섭(盧正燮, 1849-1902, 호: 蓮谷)은 경기도 개풍군 풍덕 출신이다. 23세 되던 1871년부터 가평으로 가서 김평묵과 유중교의 사사를 받았다. 그는 1876년 개항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위정척사운동인 연명유소를 올렸 으며, 1889년 목천현의 서림산 아래에 은거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난 국에 처하는 방책을 제시했는데, 상책으로‘포경입산(抱經入山)’, 중책으 로‘거의치토(擧義致討)’, 하책으로‘종풍수속(從風隨俗)‘을 들고 자신은 학문을 하면서 절의를 지키기 위한 포경 입산을 택했다. 윤석봉(尹錫鳳, 1842-1910, 자: 雲瑞, 호: 希堂, 본: 파평)은 양주출신으 로 이항로의 문인이다. 그는 1888년 그의 집안이 서천군 비인면 율리로 이 거한지 몇 년 뒤에 남포군 신안면 한천리의 화정으로 이주하였다. 이곳에 서 그는 주자의 영당인 집성당(集成堂)을 건립하여 춘추로 제향을 올리면 서 향풍을 진작시키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1896년 유인석이 거의하자 보 령의 무과 출신인 황재현을 천거하는 등 제천의병에 참여하였으며 뒤에 유 인석을 좇아 서간도로 건너가 활동하였다. 그는 1906년 5월 민종식 의병 이 홍주성을 점령한 직후 이식·김상덕 등과 함께 홍주성에 들어가 홍주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전투에서 패하여 체포된 그는 경성 감옥에 송치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의 체포 사실이《대한매일신보》1906년 9월 7일자에 b일인 역칭의사(日人 亦稱義士)c란 기사로 소개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그 가 경성 감옥에서 45일간 구속되어 있었으며, 옥중에서도 경전중의 의리 를 다룬 내용을 암송하면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의연한 태도를 취한 그를 일인들이 현인·학자·인재라 칭했다는 것이다. 그는 1910년 국망을 당하여 문묘가 폐해진다는 것을 듣고 통곡하면서 “문묘가 철향된 즉 선비가 생존할 뜻이 없다, 내가 마땅히 죽으리라”며 통 곡하였으며, 그러한 지 얼마 안 되어 죽었다. 그의 사후 1936년에 홍성의 구항면에 소재한 현원당(賢遠堂)의 도유사 이지헌 등 유생들은 그의 묘비 를 건립하기 위한 통문을 발송하는 등 그의 현창 사업을 하였음을 알 수 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