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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1910년 국망의 소식을 듣고 서산경찰서로 달려가 합방의 부당함을 주장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공주형무소에 이송도 중 차동고개 근방에서 일본인 순사 동엽(桐葉)과 산기(山崎)를 살해하고 평 생을 숨어살았다. 해방 직전인 1945년 2월 그가 죽자 서산의 유림들은 군 민장으로 서산의 음암면 선영에 장사지냈으며, 1960년에‘부재 이철영의 사 추모비’를 건립하여 그의 의기를 추앙하였다 유진하의 또 다른 문인으로 민태직과 정재학이 있다. 민태직(1868- 1935, 자: 舜佐, 호: 絅庵, 본: 여흥, 문집: 絅庵集)은 서산의 오남동에서 출생하여 34세 되던 1901년 유진하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는 1905년 이후 항일투쟁에는 나서지는 않았으나 유준근·김상정 등 민족 지사와 교유를 맺으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서산의 유기배·조성구· 박중훈·오완근 등과 당진의 유갑준·이시우 등이 있다. 정재학(鄭在學, 1888-1949, 자: 道明, 호: 方齋, 본: 함평, 문집: 方齋集) 은 당진군 정미면 수당리의 안국산 아래에서 출생하여 15세 되던 1902년 백형인 정재화와 함께 추계로 유진하를 찾아가 그 문인이 되었다. 그는 유 진하의 사후에는 의암 유인석을 찾아가 수학하였으며, 유인석의 아래에서 『화동사합편강목』의 간행에 복무하였다. 그는 1907년 유인석이 만주로 망 명함에 그를 황해도까지 좇아갔다가 유인석의 지시로 돌아와 이후에는 자 정(自靖)의 생활을 지키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사위인 김진철을 비롯하여 우제일·정장환·정부환·정진옥·이무종·이연구· 맹교혁·유기병 등 다수가 있다. 한편 유진하의 문인인 허운필(許云必)의 아들인 허후득(許後得, 1896- 1946)은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마을의 청년들과 만세운동 할 것을 결의하고 4월 8일 주민들을 인솔하여 보현산에 올라가 횃불시위를 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주모자로 체포되어 6개월의 실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