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page

64 | 들여 궐리사에서 강회를 열었다. 그는 강회에서 공자에게 축문을 올려 춘 추의 법을 받들지 못했음을 한탄하였으며, 일제의 침략에 대항할 방책을 제시하면서 이를 맹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어서 7개조의 서고문을 발 표하여 세금납부 거부투쟁을 벌일 것과, 경북 진위에서 집결하여 복합상소 투쟁을 벌일 것을 주장하였다. 최익현의 진위에서의 상소투쟁은 일본군의 사전 저지로 실행되지는 못하였으나, 1912년 그의 제자인 임병찬에 의해 조직된 독립의군부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또한 그가 주장한 세금납부 거부 투쟁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은 1910년 국망 후에 항일투쟁의 한 방법으로 시행되기도 하였다. 최익현은 정산에 거주한 6년 여간 많은 제자를 양성하 여 화서학파의 맥을 내포지역에 심었다. 유진하(兪鎭河)는 경기도 고양군 벽제에서 태어나 24세 때인 1869년 과 거의 부패상을 보고 두문불출하고 학업에만 열중하였으며, 1871년 유중교 를 가평의 한포서사로 찾아가 문하생이 되어 화서학파에 입문하였다. 그가 서산으로 이주한 것은 50세 때인 1895년 9월의 일이다. 그가 서산으로 이주한 것은 그가 50세 때인 1895년 9월의 일이다. 그의 오랜 친구인 전교리 김약제(金若濟, 호: 靑愚, 1856-1910, 본관: 경주)의 주선으로 서산시 대산면 대로리로 이사한 것이다. 그는 후한의 강혁(江革, 字: 次翁)이 난리를 당하자 모친을 업고 산 속으로 피신한 것처럼 산 속에 은거하여 노모를 모시고자 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1896년 1월 유인석 의 의병 격문을 보았다. 그는 유인석에게 글을 보내 명령에 따라 동문인 노정섭(盧正燮)과 함께 의병소에 나갈 것을 밝혔다. 그러나 그는 의병에 직 접 참전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단지 노정섭과 함께 전선전관 정창용(鄭昌 鎔, 이명: 鄭寅卨)을 유인석에게 추천하여 대장 종사가 되게 하는 등 의병 을 지원했다. 정창용은 공주 출신으로 유회군을 조직하여 동학군을 진압했 던 인물이다. 정창용은 제천의병의 소모장으로 임명되어 내포지역에서 의 병을 모집하여 음성전투에서 대장진을 구원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