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page

| 63 1890년대 이후 충남지역으로 이주하면서 가능하였다. 14) 최익현이 충청도 정산(현, 충남 청양군 목면 송암리)에 이주한 것은 그가 68세 되던 1900년 4월의 일로, 서울 근교를 떠나 벽지에서 은거하기 위해 서가 아닌가 한다. 이후 그는 고종이 밀칙을 내리면서까지 의정부 찬정 등 의 관직을 내렸으나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였다. 그는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오적을 토벌할 것을 요청하는 상소 를 올리고, 이어서 8도의 사민에게 1)오적을 토벌할 것, 2)오적이 일본의 공신이 되고자 국왕을 포로로 삼고자 할 것이니 모든 사민이 화환(禍患)을 예방할 것, 3)결세를 납부하지 말고, 일본 제품을 쓰지 말 것 등을 호소하 였다. 그 해 12월에는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강회를 열고 1906년에는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마도에 유배되어 그해 11월에 유배지에서 생애 를 마쳤다. 최익현의 의병투쟁은 1905년 12월 노성 궐리사의 강회에서 계획된 것 으로 보인다. 그는 궐리사의 교수인 신협(申 , 호: 明庵)의 초청을 받아 14) 김상기, b호서지역 화서학파의 형성과 민족운동c, f대동문화연구》35, 대동문화 연구소, 1999. 화서 이항로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