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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7 종계의 도유사, 남계옥(南啓沃, 1828-1867)이‘문장’(門丈)으로 있으면서 종계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이후 남규희(南圭熙, 1852-1902)와 남택희(南 宅熙,1863-1915), 남진희(南軫熙, 1868-1929)가 이어서 대종계를 잘 이 끌었다. 1928년에는 충장사를 다시 중수하였다. 도호(桃湖)란 말은 남상혁의 문집인『극재유고(克齋遺稿)』의「도호산수기 (桃湖山水記)」에 의하면, 복사꽃이 많은 도이리의 앞을 맑은 물이 에워싸 고 있기 때문에 불려졌다 한다. 그리고 남중우의「도호의숙」에 의하면, 도 이(桃李)란 지명은 남이흥의 장자인 의풍군(宜豊君) 남두극(南斗極)이 작은 섬에 복숭아와 오얏나무를 심고 도이도라 명명한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도 이리 안에 있는 각 지명도 뜻이 깊다. 준마를 기르던 마명동(馬鳴洞)을 지 금도‘말울리’라 한다. 궁시(弓矢)를 만든 전동(箭洞)은‘살꽂이’라 부르 고 , 무예를 닦던 궁평(弓坪)을 지금도‘활울이 들’이라 부른다. 또한 궁평 동쪽에 동각골이 있고, 서쪽에는 서각골이 있는데, 이는 동서 궁각(弓閣)이 있어 연유된 지명이다. 이러한 지명에서 의미하는 바와 같이 도이리에 세 거하던 의령 남씨 선대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과에 급제한 인물이 많다. 이들 중에 전영장 남석구(南錫龜, 字: 落瑞, 1798-1862)와 승지 남보영 (南普永, 자: 德現, 1826-1868) 그리고 유학자 남계옥(南啓沃, 1828- 1867) 등이 중심이 되어 1860년대 초에 문중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종숙 을 설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석구는 1834년 무과에 급제한 후 장연 현감 과 보성 군수 겸 해주진관 병마동첨절제도위, 수군 영장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아들 치영(致永)과 손자 준희(俊熙) 역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남보영 은 다섯아들 철희, 규희, 태희, 택희, 진희가 모두 무과급제하였다. 이곳에서 수학한 이들은 지역사회의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해미 향교의 임원 명부인『청금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9명이나 해미 향교의 대표로 지냈음을 알 수 있다. 청금록에 들어 있는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