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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남이흥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장자인 두극(斗極, 자: 于高)이 도 이리로 옮겨 살게 되면서 대호지 일대는 의령 남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남 두극은 선조 34년(1601년) 11월 출생하여 인조 3년(1625년) 25살 나이에 어모장군이 되었다. 그는 충장공이 순절한 이후 칠원(柒原) 현감에 특별 제 수되어 이후 인조·효종·현종 3대에 걸쳐 면천 군수, 단양 군수 등 여러 관직을 지냈다. 남두극은 인조 19년(1641) 8월 6일 도이리에 고택을 개축하고 상량식을 올렸다. 지금으로부터 370여년 전의 일이다. 묘소도 충장공 남이흥의 묘 까지는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남두극의 묘부터 도이리 관창산(觀滄山) 에 있었음을 보아 그때부터 충장공 후손들이 도이리에 정착하였을 알 수 있다. 남이흥의 손자인 남영(南泳)은 인조 10년(1632년) 4월에 출생하여 통훈대부 장흥 고직장을 지냈다. 그의 묘 역시 관창산에 모셨다. 남이흥의 손인 택(澤, 자: )는 인조 26년(1648년)에 태어났다. 그는 무과급제하 여 어모장군을 지냈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부총관 의림군에 봉해졌다. 남이흥의 고손인 익화(益華, 자: 平叔)는 현종 8년(1667년) 태어났다. 그 는 숙종 33년(1707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칠곡 부사, 철원 부사,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지냈으며, 영조 5년(1729년) 가선대부 영종첨사 의안군에 봉해졌다. 그는 칠곡 부사로 있을 때『충장공유사록』을 간행하였으며, 위 토를 설치하고 대종계를 설립하여 종중의 체계를 갖추었다. 이후 충장공 후손 중에 많은 무과 출신자가 배출되었다. 『의령 남씨 대동 보』에 의하면, 남석구의 손자 준희(俊熙)가 1871년 신미무과에 급제하였으 며, 남보영의 아들 택희(宅熙, 1889년 기축무과)와 진희(軫熙, 1887년 정 해무과), 남정석(南廷奭)의 아들 건희(建熙, 1880년 경진무과), 남합원(南 合元)의 아들 정구(廷九, 1889년 기축무과), 남택원(南宅元)의 아들 정봉 (廷鳳, 1899년 기축무과) 등이 급제한 것으로 알려진다. 1914년 남정섭(南廷燮)이 간행한『조선과환보(朝鮮科宦譜)』‘의령 남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