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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12) 『황성신문』1906년 7월 27일, ‘대동고사(大東古事). 다. 이는 조선의 영웅이 다시 출현하여 민족의 위난을 구하기를 희망했기 때문이었다. 남이흥에 대한 기사도 곳곳에 보인다. 그 중에 황성신문 1906 년 7월 27일자의 기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대동고사(大東古事)’란 기사에서‘남이흥’이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南以興은 仁祖朝時에 爲平安節度使 야 鎭守安州城이러니 丁卯虜亂에 賊兵이 大至 야 城遂陷이라 以興이 歎曰吾爲西邊之將 야 以朝家猜疑로 不敢鍊一卒이라가 以至於此라 고 自焚以死 니라 12) 남이흥의 후손들 역시 충장공의 충의정신을 종중의 얼로써 계승하고 있다. 후손 중에 남중우는 제20회 남이흥장군 문화제에 즈음하여 다음의 시를 지어 선조의 정신을 기렸다. 남중우(호: 東里)는 1924년생으로 남상락(南 相洛)의 둘째 아들로『의령남씨 충장공파보(宜寧南氏忠壯公派譜)』를 편찬 한 한학자이다. 제20회 남이흥 장군 문화제에 즈음하여 (2008年) 동리 남 중 우 (1) 남은 가시고 자취만 남아 온 겨레가 울었던 정묘호란 마지막 싸움터에서 자폭까지 한 수장의 붉은 피 안주성 백상루 그때를 못 잊어 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