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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 그가 부원수 겸 평안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청 태종은 아민을 대장으로 하여 조선의 지리를 잘 아는 강홍립 과 이괄의 반란군이었던 한명련을 앞세우게 하고 3만6천의 군사를 출동시 킨 것이다. 남이흥은 3천여 군사를 이끌고 안주성에서 혼신을 다하여 대적 하였다. 평안 감사 윤헌에게 장계를 보내 증원병을 요청하였으나 윤헌은 증원병을 보내지 않았다. 남이흥은 장수들을 모아 성을 사수하기로 결의하 였다. 청국의 아민은 수차례 사자를 보내어 항복을 촉구하였으나 이미 결 사 항전을 결의한 남이흥 이하 장수들은 중과부적의 처지를 알면서도 끝까 지 항전하였다. 남이흥은 쉴새 없이 밀려드는 적병들의 공격으로 수성이 불가능하게 되자 적병을 화약고 있는 곳으로 유인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도 화약을 지니고 화약고에 점화하여 몰려드는 적들과 함께 자폭하여 순국하였다. 그날이 정묘 1627년 1월 21일이다. 듣는 사람들이 그 죽음을 슬퍼하고 그 충성을 애처롭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우리나라 전란사 에 야전총지휘관인 원수로서 살신보국(殺身輔國)함은 보기 드문 충절이라 하겠다. 청나라 병사들은 비록 전투에서 승리를 했으나, 남이흥 대장을 비롯한 조선 병사들의 죽음을 불사한 항전에 충격을 받고 충의 정신에 감동되었 다. 사령관 아민은 조선 병사들의 충의를 기리며“조선은 충의의 나라라고 하더니, 내 이제 그 참모습을 이 두 눈으로 보았다”라며 안주성에서 체포 된 백성 수백 명을 모두 석방하면서“조선 병사들의 충의에 감동되어 너희 를 석방하니 각기 고향에 돌아가 안심하고 생업에 힘쓰라”고 하였다. 명나 라 황제는 남이흥의 애국충절을 명나라 백성들에게 본받게 하기 위한 행사 를 황궁 앞에서 했다. 인조는 안주성의 전투와 남이흥의 순국 소식을 듣고 국장으로 장례하도 록 하였으며, 장례시 곤룡포를 벗어 장군의 관 위에 덮어주고 눈물을 흘리 며 애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