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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 여 후금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이후 명에서는 광해군의 친후금 정책을 의 심하게 되었고, 명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조선을 감독하려 한 것이다. 더욱 이 광해군 13년(1621)에 명나라는 심양과 요양을 후금한테 빼앗기고 말았 다. 명나라에서는 모문룡을 앞세워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들어왔다. 모문 룡은 의주를 근거로 하여 빼앗긴 지역을 회복하려 한 것이니, 이 일은 후금 측에서는 조선이 명을 지원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이 때 광해군은 정충신 을 후금의 누루하치에 보내어 조선의 어쩔 수 없는 형편을 변명하게 하였 다. 이러한 때에 명 사신이 다시 안주에 입성했으니, 이 일은 매우 민감한 외교 사안이 아닐 수 없었다. 남이흥은 이러한 민감한 시기에 명 사신을 안 주에 붙잡아 두어 외교 마찰을 최소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남이흥의 책략을 광해군은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사의 탄핵 요구에 오히려 특진을 시킨 것이다. 그러나 서인들의 반정으로 광해군은 쫓겨나고 인조가 등극하였다. 인조 반정 후 광해군의 신임은 오히려 남이흥에게 화가 되었다. 광해군 때에 중 용되었던 신하들은 모두 죄목을 만들어 치죄하였다. 평소에 남이흥을 원망 하던 이들이 이틈을 이용하여 남이흥을 중상 모략함에 화를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도원수 장만(張晩)이 남이흥의 인품과 능력을 알고 잘 변호 하여 화를 면하게 함은 물론 그를 중군으로 삼아 군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그가 49세 때인 인조 2년(1624) 이괄의 반란인 큰 내란이 발생하였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던 이괄은 공훈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뿐 만 아니라 그의 아들도 반정에 참여하였으나 논공에 들어가지 못하였으며, 그의 동생도 문과에 등용되지 못하자 불만이 쌓여갔다. 그러던 중에 후금 의 침입에 대비한다 하여 장만의 휘하에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하여 영변에 발령을 내자, 그는 이를 좌천으로 생각하고 불만은 더욱 커졌다. 때 마침 그의 아들이 변고를 일으켰다 하여 조정에서 선전관 김지수와 의금부 도사 심대림을 보내 그를 잡아들이게 하였다. 그러자 이괄은 이들의 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