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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사로 부임하여 임진왜란 때 불탄 촉석루를 비롯하여 북장대와 서장대, 동 장대 등을 중건하였다. 그가 촉석루를 중건 한 치적을 기리는 많은 시들이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임진왜란 때 불탄 진주 북쪽 비봉산에 있는 의곡사를 복원하도록 하였다. 그는 광해 11년(1619)에는 구성 부사 겸 방어사가 되어 산적들로부터 백 성의 재산을 보호하고 평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함에 다음 해 그가 안주 목사 겸 방어사를 제수 받아 떠남에 백성들이 송덕비를 건립하였다. 그 비 문에는“미만일삭(未滿一朔) 은중백년(恩重百年)”이라 하였다. “한 달이 안 되었어도 그 은혜는 백년 신세짐보다 중하다”라는 뜻이니 그의 치적이 단 기간에 얼마나 뚜렷하게 나타났는지를 알려준다. 1620년 안주 목사 겸 방어사를 제수 받아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조정 에서는 그를 중상 모략하는 이가 있었다. 남이흥이 안주 목사로 있던 중에 중국의 사신들이 안주에 오게 되었는데, 이때 남이흥은 나라의 안위와 관 련이 있다고 생각되어 이들을 정성스럽게 대접하였다. 중국 사신들은 감복 하여 칭찬하고 표창까지 내렸다. 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양사(兩司)에서는 오히려 남이흥이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중국 사신들에게 잘 보이려 했다면 서 그를 탄핵하였다. 이에 대하여 광해군은 양사의 의견을 무시하고 남이 흥을 자헌대부로 특진시켰다. 이 당시의 상황이 광해군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남이흥은 명나라 황제의 사신이 내방하자 관기에게 남 자 옷을 입혀 들여보내고 유흥에 빠진 사신은 조선의 다른 곳은 둘러 볼 생 각도 하지 않고 안주에만 머물다가 돌아갔다. 이 시기는 후금의 세력이 확장되는 시기였다. 광해군 8년(1616) 후금의 누루하치는 명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명에서는 임진왜란 때 지원한 일을 들어 조선에 10만 명의 원군을 요청하였다. 1618년 광해군 은 명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1만 명의 군사를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여 파병하였다. 그러나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에 따라 후금과 은밀히 교섭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