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page

36 | 압록강 물에 안개가 자욱하고 용만(龍巒)의 산자락에는 월색만 가득하여라 괴롭게 시를 읊조리는데 겸하여 병이 드니 긴 휘파람이 도리어 부료하구나 거울속에 비친 백발은 새롭기만 한데 하늘 가에서 검은 배자가 떨어지누나 봄바람에 준마를 달려서 옛 친구를 자주 찾아주오 35세 때 용천 군수를 제수 받은 그는 다음 해 이를 사임하였다. 그리고 이 어 부령 부사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군량을 비축하고 병기를 정비하여 6진 중에서 첫번 째가는 진영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 공이 인정되어 38세 되던 광해군 5년(1613년)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다음 해 에는 다시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이어 부총관 겸 포도대장, 군기시 제 조를 제수 받았다. 47세 때인 광해군 7년(1615)에는 공홍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기강을 바로잡았다. 이 무렵 이이첨의 하인들이 주인의 권세를 등에 업고 양민들을 괴롭히는 등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관 리들은 이이첨의 세도에 눌려 감히 그들을 다스리지 못하였다. 남이흥은 그 정황을 듣고 그들을 가차 없이 잡아다가 죄를 물어 장살하였다. 양민들 은 모두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대사간원이 남이흥 을 이 일을 들어 탄핵하였다. 광해군은 그의 치적을 참작하여 문책하지 않 고 직에서만 물러나게 하였다. 42세 때인 광해 9년(1617)에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겸 진주 목사로 부 임하였다. 그가 재임 기간 중에 촉석루로 널리 알려진 진주성을 중수하였 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김시민 장군이 왜군을 대파한 곳이며, 정유재란 시에는 군관민 6만여 명이 장렬한 최후를 마친 곳이다. 남이흥은 진주 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