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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모친께서 서울 집에 있는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들 을 찾으러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건장한 하인 몇 명을 거느리고 가 기로 했다. 남이흥도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모친이 말하기를, “서울이 흉 흉하여 시끄러우니 위험한 것을 무릅쓰고 가는 것은 안 된다.”하였다. 그 러자 남이흥은 웃으며, “근심하지 마소서”하고 하인들과 함께 서울로 들 어가 가장 중요한 물건들을 거두어, 여러 바리에 짐을 싣고 성문을 나왔다. 그런데 피난하는 사람들이 길을 메우고 붐비기 때문에 말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남이흥이 활에다 살을 메운 채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갔다. 이때 무뢰배들이 사람들의 짐을 약탈하고 구타하여 피를 흘리게까지 하였다. 남이흥은 말을 달려, 앞에 선 도적을 향하여 연이어 활로 쏘고, 크 게 호통을 쳤다. 도적들이 놀라 흩어지므로, 피난하는 사람들이 무사히 벗 어날 수 있었다. 남이흥의 가문은 원래는 문반 가문이었다. 대대로 문인을 배출한 집안에 서 태어난 그 역시 글 공부를 하여 문과에 응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부친 이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게 되자 아버지 전사에 충격을 받아 글 읽기를 중단하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무과의 길을 택하였다. 남이흥은 27세 되던 선조 25년(1602) 무과에 지원하여 급제하였다. 28 세 때 선전관 겸 비변사 낭청에 임명되었다. 29세 때는 장연 현감으로 부 임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아전들의 폐단을 일소하여 현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그의 이러한 치적은 안문어사(按問御使) 이지완(李志完)이 장연현감 남이흥은 나이 어린 무부로서 마음을 가다듬어 백성을 다스림 으로 치적이 크게 소문 났습니다. 8) 8) 『선조실록』선조 38년 4월 26일 경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