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page

| 33 세웠는데, 비석이 일제 강점기 멸실되었다. 후손들이 1987년에 문헌을 토 대로 하여 대호지의 충장사 경내에 비석을 복원하였다. 현재 탁본은 국사 편찬위원회에 있으며, 탁본한 연대는 1920년대로 추정된다. (2) 남이흥의 충절 남이흥(1576-1627)은 무신으로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 시호 는 충장(忠壯)으로 충청도 무반 가문인 의령 남씨 충장공파의 파조이다. 그 는 1576년 7월 의천부원군 남유(南瑜)와 전주 유씨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 어났다. 어려서부터 몸이 장대하고 기질이 뛰어났고 남다른 정의감이 있었 다. 어릴 때 기상이 보통 아이들과 달라, 장난치고 놀 때에 혼자 높은 곳에 앉아서 여러 아이들을 좌우로 지휘하고, 조금이라도 영을 어기면 반드시 벌을 주었다 한다. 어린 시절 외사촌 형 되는 두세 아이와 우물가에 모여서 놀다가, 한 아이 가 넘어져서 빠지려 하였다. 남이흥은 급히 그 소매를 잡고 두 발을 우물 돌에 버티고, 큰 소리를 지르니 집안 사람들이 놀라서 구하였는데, 다른 아 이들은 곁에 있으면서 웃으며 보고 있기만 할 뿐이었다. 외조부 판서 유공 (柳公)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이 아이가 다른 날 위태한 것을 건지는 좋은 재목이 될 것이다.”하였다 한다. 그가 17살 되던 임진년 봄에, 왜적의 정세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때 그 의 아버지가 좋은 말을 기르고 있었는데 아직 달리는 것에 길이 나 있지 않 았었다. 남이흥이 매일 밤중에 타고 달렸더니, 말 먹이는 하인이 말렸다. 이에 그는 말하기를, “마땅히 전쟁 터에서 쓰일 것이다.”라고 하자 사람들 이 모두 웃었는데, 그해 여름에 왜적이 들어오자 아버지가 임진강 싸움에 서 그 말 덕분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부친은 부평 부사로 재직 중이었다. 가족들도 서울 집을 떠나 부평에 있었다. 이 때 서울에서는 난리를 피해 피난 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