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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 이 어찌 유래하는 바가 없을 것인가. 부친 이요당(二樂堂)은 퇴계와 더불 어 호당에 선발되어 도의로 교분을 맺고 공을 낳았다. 공이 같은 일로 같 이 죽은 사람인 충무공 이순신과 함께 제향을 받지 못한다면 노량에 조수 가 밀리는 아침이나 달 밝은 밤이면 정령이 옛 싸움터를 거닐며 한스럽게 생각하리니 이 뜻을 도내 군자들에게 고하노라. (「가승」참조). 또한 함양의 사림들 역시 다음과 같은 통문을 발의하였다. 의천군 남공이 나주에서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충무공과 더불어 힘을 합쳐 싸우다가 함께 죽었으니, 하나는 충무공이요 다른 하나는 남공이다. 사당을 세워 제사하는 일이 민멸하였으니 이는 충무공은 통제사였고 남공 은 나주목사로 내원한 까닭이다. 남공의 충절과 의리는 충무공이 잘 아는 바이니 그 충절로 말하자면 어찌 충무공과 고하가 있을손가. 원컨대 여러 어른들은 함께 받드는 논의를 하소서. (「가승」참조). 하동의 선비들 역시 통문을 작성하여 남유를 충열사에 배향할 것을 발의하 였다. 다음의 내용이 그것이다. 노량에서 적을 격파하던 날에 일신을 돌보지 않고 왜적에 달려든 것도 이순신과 같고 총탄에 맞아 죽은 것도 이순신과 같았다. 공업이 같은 사람 이거늘 어찌 충절을 정(旌)하고 향사를 받드는 방법은 충무공과 같지 않으 니 충무공 영령도 반드시 애석해 할 것이다. 원컨대 여러 군자는 특별히 공의를 내어 충열사에 병향(竝享)토록 바라노라. (「가승」참조). 이와 같은 전국 사림들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상소를 올린 지 5년 후에 노 량전적지에 그의 유허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좌의정 서명선이 지은 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