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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7) 『영조실록』영조 50년 계미 8월 12일. 추록되었으며, 숙종 때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영조 조에 남유에 대한 포상에 대하여 불공평하다는 공론이 일어났다. 충무공 이순신과 같은 전투에서 같이 전사함에도 포상의 격차가 심한 것을 보고 경상, 전라, 충청, 경기의 뜻있는 선비들이 어느 신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느냐면서 통문을 발의하였으며, 상소까지 올린 것이다. 상소 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7) 신(臣) 남유는 때마침 자친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 나주 목사로 이순신과 같이 일하여 수차 승리를 거두더니 무술년에 많은 왜적이 노량으로 밀려 와 이공(李公)이 진군할 때 모든 진의 병선이 뒤에 처졌으나 오직 남유가 먼저 나서 사투하여 적선 30척을 불사르고 적탄에 맞은 지 3일 만에 사 망하였습니다. 그후 아들 이흥이 인조 2년 갑자에 이괄 난을 평정하는 공 을 세웠고, 인조 5년 정묘호란에 안주에서 전사하니 부자의 정충대절(貞忠 大節)은 역사서에 드문 일입니다. 이흥이 세운 바 대절은 실로 가정의 가 르침에 말미암은 것인즉,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이르겠습니다. 이억기 와 남유를 함께 들어 절혜(節惠)의 특전을 베풀도록 하소서. 남유의 사후에 각도의 사림들이 발의문과 상소를 올려 그의 충절을 기렸 다. 그중에 단성의 사림들이 발의한 통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소서행장이 노량에 도달했을 때 이순신은 단지 7척의 배를 거느 리고 먼저 도착하였고, 남유 목사가 거느린 배들도 동시에 도착하여 적선 30척을 격파하니 두 분의 공이요 영남인들이 생존한 것도 두 분의 은덕이 다.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일은 창졸간에 되는 일이 아니거늘 남공의 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