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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 노량해전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 가운데서 마지막 전투이다.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 11월 18일부터 19일 이틀 사이에 이순신과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 함대가 경상남도 남해와 하동과 사이에 있는 노량 앞바 다에서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을 말한다. 1597년 재침한 왜군은 그 해 9 월 명량해전에서 패배한 데 뒤이어 육전에서도 계속 고전하였다. 다음 해 8월 도요토미(豊臣秀吉)가 병사하자, 왜군은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철수 작전을 서둘렀다. 이 소식을 접한 이순신은 왜적을 한 척도 돌려보내지 않 을 비장한 각오로 고금도를 떠나,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과 함께 노량 근해 에 이르렀다. 왜장 고니시는 수륙 양면으로 위협을 받게 되자 진린에게 뇌 물을 바치고, 퇴로를 열어줄 것을 호소하였다. 고니시는 통신선으로 사천 (泗川) 등지의 시마쓰(島津義弘)와 연락해 남해·부산 등지에 있는 왜군 수 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 수군을 협공하면서 퇴각하려는 생각이었다. 11월 18일 밤 이순신의 예견대로 노량 수로와 왜교 등지에는 500여 척의 왜선이 집결해 협공할 위세를 보였다. 이순신은 200여 척의 조·명 연합 수군을 거느리고“이 원수만 무찌른다면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此 若除 死則無憾).”라고 하늘에 빌고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19일 새벽, 싸움에서 조명연합군은 왜의 수군 선박 200여 척을 격파하는 대 승리를 이루었다. 왜군은 패잔선 50여 척을 이끌고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도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던 중 총환을 맞고 쓰러지면서“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 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愼 勿言我死)”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의 휘하에서 중군으로 전투를 독려하던 남유도 적탄에 맞아 전사한 것이다. 남유는 순국한 뒤에 이순신보다 한 단계 낮은 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 다. 후일 아들 남이흥의 공로로 좌의정과 의천부원군에 추증되었다. 그의 아들 남이흥은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로를 세웠으며, 정묘호란 때 순 절하였다. 남유는 아들의 공적이 인정되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