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page

| 29 작은 말로 고향에 돌아오니 고궁(固窮) 합니다. / 款段還鄕只固窮 ° 오랜 세월의 아량을 생각하면 견디기 어려우며 / 不耐長時懷雅量 ° 몇 번이나 대사(大似)를 쫓아 청아한 풍격(風格)에 읍(揖)했던가. / 幾從大似 淸風° 사마(四馬)로 서순(西巡)하는 가을 바람 속에 / 西巡駟牡秋風裏° 남쪽으로 송균(松筠)을 모우중(暮雨中)에 바라옵니다. / 南望松筠暮雨中 ° 다행이 작은 일을 여정(閭井) 가까운 곳에 얻었으니, / 幸得割鷄閭井近° 급히 서찰을 다듬어 오는 기러기 편에 부칩니다. / 急修書札付來鴻° (번역: 南松 蔡奎鮮) 2) 남유 남이흥 부자의 충절 (1) 남유의 충절 남응룡은 남황과 남유 두 아들을 두었다. 큰 아들인 남황은 사축서(司畜 署) 별제(別堤)를 지냈다. 남유는 곧 남응룡의 둘째 아들이다. 남유(南瑜, 1552-1598)는 나주 목사로서 이순신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 다가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인물이다. 좌의정에 증직되고 의천부원군에 봉 해졌으며 충신 정려가 내려졌다. 그의 자는 시망(時望)이다. 할아버지는 참 판 세건(世健)이고, 아버지는 남응룡(南應龍)이고 어머니는 현감 정맹수(鄭 孟壽)의 딸인 영일정씨이다. 남유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28세 되던 선 조 12년(1579) 무과에 급제한 뒤 부평 현감이 되었다. 정유재란 중 나주 목 사로 있으면서 노량해전에 참전하였다가 적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다. 노량 해전은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중요한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남유는 이 순신의 휘하에 중군으로 참여하여 이순신의 뒤를 이어 전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