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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5) 『퇴계선생문집』별집 1권 1시. 그러나 1555년(명종 10) 39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손자 남이흥의 공적 으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묘는 처음에는 광주의 음죽에 모셨다가 1971년 3월 대호지면 도이리에 이장하였다. 남응룡은 1547년(명종2년) 13년 연상인 퇴계 이황(1501-1570)과 독서당 인 호당(湖堂)에서 함께 학문에 정진하며 왕세자들을 가르쳤다. 그가 죽자 퇴계는 제문을 써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니 퇴계와의 교분을 짐작할 수 있다. 퇴계문집에 의하면 퇴계가 남응룡에게 준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5) 퇴계가 경림(景霖) 남응룡에게 준 시(次韻景霖 南應龍 見贈) 고요한 밤 장실(丈室)에 향을 피우니 / 靜夜燒香丈室空 ° 코 속에 오직 고요한 가운데 통함을 느끼네 / 鼻中惟覺寂然通 ° 다른 때엔 아직 선왕의 도(道)가 어두었는데 / 他時尙昧先王典 ° 오늘엔 오히려 장자의 교화를 듣는다. / 此日猶聞長者風 ° 뱀이 나무뿌리를 무는 쥐를 따라 우물 바닥에서 올라오네 / 蛇 樹根從井底 ° 땅이 우레를 만나니 소리가 샘 안에 있네. / 地逢雷響在泉中 ° 무리를 떠나면 고루해질까 두렵고 / 成孤陋° 치아와 머리털은 해가 갈수록 점점 같지 않구나 / 齒髮年來漸不同 ° 또한 이황의 형인 이해(李瀣, 1496(연산군 2)∼1550(명종 5))와도 교유 가 있었으니, 온계(溫溪) 이해가 남응룡에게 보낸 시가 전한다. 이해는 이 황의 형으로 자는 경명(景明)이고 온계(溫溪)는 그의 호이다. 정민(貞敏)이 란 시호를 받았다. 이 시는 이해가 황해도 관찰사였을 때 보낸 것이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