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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2) 『명종실록』명종 2권, 즉위년(1545 을사) 10월 29일 그는 1545년(명종 즉위년) 5월에는 홍문관 부교리로 시강관을 지냈다. 같은 해 10월 종사관으로 재직 중에는 중국 사신들이 군인들을 때리는 등 폐단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종사관(從事官) 남응룡(南應龍)이 원접사(遠接使) 정사룡(鄭士龍)의 뜻 으로 와서 아뢰기를, “날씨가 몹시 더운데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 또 길 을 곱잡아 빨리 몰고 군인을 때린다면 죽거나 다치는 자가 더욱 많아 그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니, 부지런하고 착실한 차사원(差使員)을 따로 정하 여 죽을 나누어 가지고 다니며 두루 구휼하여 일로(一路)의 군인이 쓰러 지고 굶주리는 걱정이 없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 뜻을 빨리 개성부 유수와 황해도·평안도 등의 관찰사에게 하유하소서. 신이 전에 중국 사신이 왔을 때 백성이 몹시 지치는 폐단을 눈으로 보았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2) 남응룡의 건의에 대하여 중종은“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다음 해인 명종 1년(1546) 2월에는 조강에 나아가《소학》을 강하였다. 강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학문은 치국 평천하(治國平天下)에 이르기까지 그 공부가 애당초《소 학》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학》이라는 것은 다만《소학》에서 이룩된 공부를 미루어 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이 책을 모름지기 어릴 적부터 깊이 생각하여 읽 은 뒤에야 사정(邪正)·치란(治亂)까지도 다 분별할 수 있습니다. 임금은 반드시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길로 흘러들게 될 것이 니, 역대(歷代)에서 찾아보면 모두가 다 그러합니다. 송(宋) 철종(哲宗)이 어린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