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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 1) 『중종실록』제100권, 중종 38년(1543 계묘) 4월 18일 役)할 때가 되면 죽을 곳으로 가느니보다는 차라리 도망하여 신역(身役)을 피하는 것이 낫다고 여깁니다. 때문에 신역의 댓가를 준비해 보내는 것을 상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입번(立番)하는 자들은 거의 나이 들고 노쇠한 사람 뿐이어서 매우 불쌍합니다. 만일 뜻밖에 변방의 흔단( ) 이 발생한다면 성문(城門)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뿐 만이 아닙니다. 왜인들이 왕래할 적에 경상 일도(一道)가 여러 가 지로 많은 폐단을 받고 있습니다. 짐을 실어 나를 때에는 연로(沿路) 각 고을의 인리(人吏)가 모두 나와서 밤낮없이 물품을 운반하느라 길을 메웁 니다. 심지어는 처자(妻子)들까지 고통을 받는가 하면 무거운 짐을 실어 나르던 소가 길 가운데 죽어 나자빠지는 일도 허다합니다. 그리하여 그곳 백성들이, 왜노(倭奴)만 없으면 인마(人馬)가 좀 편안해지겠다고 합니다. 왜인들 또한 나라에서 교린(交隣)의 의리 때문에 매우 후하게 접대하는 것 을 알고 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수령을 업신여기고 아랫 사람들을 구타하는 등 모욕적인 짓을 그치지 않습니다. 교린의 도리 가 중대하다고는 하나 우리 나라를 무시하는 폐단 또한 작지 않습 니다. 이번에 온 객사(客使)에게는 접대하는 도리를 잃었고, 은 냥(銀兩)에 대한 일도 도리에 맞게 조처하지 못하였습니다. 하 나같이 객사의 말만 따라서 의논하고 고치고 했기 때문에 끝내 호령이 일정하지 못했으므로 왜노가 이를 풍자하는 시를 지었 다고 하니, 지금같이 왜인 접대를 잘못한 적은 없었습니다.” 1) 남응룡은 수군(水軍)의 신역으로 인한 고통과 왜인에 대한 접대로 인하 여 지방민의 고역이 심하고 왜인이 우리나라를 무시하는 폐단이 있다면서 이의 시정을 임금께 아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