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page

20 | 지역의 유학적인 학풍을 알게 해준다. 그 중에서 도호의숙이 대표적인 종 숙(宗塾)으로 3·1운동을 주도한 이들을 다수 배출한 특징이 있다. 2. 의령 남씨의 대호지 정착 1) 남세건의 대호지 순행 대호지는 의령 남씨의 세거지이다. 의령 남씨는 조선 초기부터 관계에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남이흥의 5대조인 칭(稱)은 성종 조에 부사직(副司直)을 거쳐 수 원 부사와 내섬시 부정을 지냈다. 고조부인 변( )은 군수를 지냈다. 증조부는 남 세건(南世健, 자: 백순(伯順), 1484(성종 15)~1552(명종 7))이다. 의령 남씨가 대호 지에 세거하게 된 것은 남이흥의 증조부인 남세건(南世建)이 충청도 관찰사로 있 을 때 관내를 순행 중에 해미현에 속해 있던 도리 땅을 자손을 보존할 수 있는 땅 이라 하여 점지한 이후라고 전해진다. 남세건은 문음(門蔭)으로 참봉이 되었다가, 중종 2년(1507)에 진사시에 3등으로 입격하고, 중종 19년(152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29 년 지평·부수찬·부교리·시독관을 거쳐 이듬해 교리가 되었다. 1531년 응교·전한을 역임하고 이듬해 시강관이 되어 기강이 해이해짐을 바로잡 을 것을 주장하였다. 1533년 직제학이 되고 이듬해 대사간·동부승지·우 부승지를 거쳐서 1535년 우승지가 되었다. 1536년 병조참판에 이어 충청 도관찰사로 나갔으며, 이듬해 호조 참판과 대사헌을 역임하고, 1541년 전 주부윤, 1542년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1544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 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인종이 즉위하자 가선대부(嘉善大夫)로서 호조 참 판이 되고『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인 조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사은 겸 주문진하사(謝恩兼奏聞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1546년 형조 참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