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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적서리에는 연안 차씨 문중에서 설립한 강당이 있다. 1908년 3월 15일 설립한 것으로 알려지며, 연안 차씨 선조의 가업을 전수하며 자손의 교육 수단으로 삼았다. 이들은 문중의 부담으로 강당 6간, 산림 2정, 밭 945평, 논 1,964평을 매입하여 개설하였는데 훈장의 임기 동안 그 자산을 대여하 여 훈장의 생계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초대 훈장으로서는 안계원(安啓 遠)을 초빙하여 종중의 자손 중 5~6세의 남아는 의무적으로 취학케 하였 다고 한다. 하지만 1922년 조금초등학교가 설립된 뒤로는 점차 퇴색하여 오다가 1958년 철폐되었다. 역대 훈장으로는 안계원의 뒤를 이어 이철우 (李喆宇), 한운석(韓雲錫), 용암(勇庵) 심원성(沈遠聲) 등이 알려지고 있다. 이들이 대호지 4·4 독립만세운동에 어떠한 교육을 하였는지는 자세히 알 려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진하의 문인인 심원성과 한운석이 훈장을 하였 고 연안 차씨 문중 인물로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사람도 많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한학과 함께 항일 교육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외의 서당으로는 남주원이 세운 사성리의 반곡학당(盤谷學堂), 남정이 도이리 용화동에 세운 용화사숙(龍華私塾), 남상찬(南相瓚)의 도이리 전동 사숙(箭洞私塾)등이 있다. 이성하(李成夏)가 다녔다는 마중리의 마새서당, 박성운(朴聖云)이 다녔다는 송전리의 창말학당, 또한 두산 2리의 매봉산 자락에 두릉정사(杜陵精舍)가 있었고, 도이1리 홍수동에 있었던 홍수동 서 당이 있었다. 훈장은 남상목(南相穆)인데 남규광씨 사랑채에 서당을 마련 하였다. 이 외에도 도이리 말우리에 있었던 말우리 서당, 도이리 살고지 아 랫말에 있었던 살고지 서당, 도이리 양지편 현재의 충장사 유물관 자리에 있었다는 양지편 서당, 출포리 날개에 있었다는 날개서당, 조금리 용수말 에 있었다는 용수말 서당, 두산 1리 양지말에 있었던 양지말 서당, 장정리 도당골의 도당골 서당, 송전리 음산말과 창말에서의 송전리 서당, 두산 2 리의 하두서당 등, 그 설립 시기가 해방을 전후한 시기인 곳도 많지만 동리 마다 서당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와 같은 서당의 발달은 대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