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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 전하였다. 그는 학당의 규약을 정하고, 강계(講契)도 설치하였다. 남규희의 뒤를 이어 백파(栢坡) 남택희(南宅熙)가 교육을 담당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화서학파의 유학자 성재 유중교(柳重敎)의 제자인 존재 유진하(兪鎭河)와 그의 제자인 직암 이철승(李喆承) 등 유학자들을 초빙하여 한학은 물론 민 족교육의 요람으로 발전하였다. 도호의숙은 의령 남씨 이외의 타성도 모집 하여 교육시켰으며, 이곳에서 수학한 인물들은 대호지 3·1운동의 주역으 로 활동하였다. 뒤이어 일제의 강압으로 폐쇄된 후 도이강습소(桃李講習 所)로 명맥이 이어지다가 1930년대 초에 이마저 완전 폐쇄 되었다. 성균관 장을 역임한 이재서(李載瑞)와 한학자 이병태를 비롯하여 의령 남씨의 3학 사와 3명창이 모두 이곳 출신이다. 대호지면 사성리의 반곡정사(盤谷精舍)는 사성리 밀양 박씨 문중의 종숙 이었다. 1870년대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당시의 경영자는 박영수 (朴永秀), 박용화(朴龍和, 1873~1933)부자이다. 이 가문은 선대에 참판을 역임하였기에 박 참판 댁이라는 택호가 주어졌고 박용화도 무과에 급제하 여 박 선달로 칭해지다가 관직이 오위도총부 용양위 사과(五衛都摠府龍 衛 司果)로 있었기에 병조 댁(兵曺宅)이라 하였다. 반곡정사는 상당히 넓은 방에 초등, 중등, 성인 반으로 구분하여 능력별 개별 학습을 시켰다. 반곡정사의 학생출신으로 대호지 4·4 독립만세운동 에 참여한 사람도 여러 명으로 밝혀지고 있다. 박경옥(朴敬玉, ?~1919.6.5)은 옥사하였고 박희택(朴熙澤, 1876~1936)은 1919년 5월 21 일 공주지방검찰청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박준화(朴俊和, 1885~1956)는 그 위패가 창의사에 봉안되었으며 박희용(朴熙容, 1895~1929)은 1919년 10월 24일 공주지방법원에서 태형 90도를 받았다. 박용화(朴龍和, 1862~1933)와 박명화(朴命和, 1886~1968)도 그 위패가 창의사에 봉안되었다. 반곡정사는 계속 운영되다가 1922년 조금초등학교 가 설립되면서 서당이 되었고 1950년대까지 존속하다가 소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