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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 이 운동은 시위과정에서 왜경을 구타하고 천의주재소를 파괴하는 투쟁적 시위였다. 왜경과 헌병대에 의해 199명의 인사들이 체포되어 혹형을 받았 다. 현장에서 사살되어 순국한 이도 나왔으며 옥중에서 고문으로 순국한 이도 3명이나 되었다. 또한 징역형이나 태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룬 인물 이 백여 명에 달한다. 이들 중에 도호의숙에서 교육을 받은 인물이 상당수 확인된다. 남주원을 비롯한 남계창·남상직·남상락 등이 3월 1일 광무황제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올라가 파고다공원에서의 만세시위에 가담했다가 내려와 만 세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이다. 그리고 남상집과 남상돈을 비롯하여 총 49 명에 달하는 이들이 도호의숙에서 수학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호지 만 세운동에 참여한 공적이 인정되어 창의사에 봉안된 인물 중에서 남이흥의 후손이 60명에 달한다. 이들 역시 의령 남씨의 종숙인 도호의숙에서 수학 하였을 것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도호의숙은 의령 남씨 집안의 서당으로 설립되어 남유와 남이 흥의 충의정신은 물론, 유진하와 그의 문인인 이철승과 같은 화서학파 유 학자들의 철저한 존화양이론에 입각한 위정척사정신을 가르쳤다. 학생들 은 서당 교육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의 우수성을 알게 되었으며, 동시에 우 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고양되어 자주독립 정신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도호의숙에서 민족의식을 깨친 이들은 대호지 만세운동의 주역으로 참여 하였으니 도호의숙은 한학을 전수하는 서당으로서만이 아닌 명실공히 민 족교육의 산실이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