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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유물들을 보관하고 있다. 이러한 집성촌의 발달은 집단적인 활동을 용이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으 니 그 결과 대호지의 주민들은 대호지 3·1운동과 같은 민족운동에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할 수 있다. 실제로 3·1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의 사당인 창의사에 배향된 총 578명(2006년 현재)중에 10명이상 배출한 집안만 보 아도, 부안 김씨가 75명, 연안 차씨가 69명, 의령 남씨가 59명, 전주 이씨 가 42명, 밀양 박씨가 41명, 김해 김씨가 24명, 경주 최씨가 22명, 여산 송씨가 20명, 제주 고씨가 19명, 나주 임씨가 12명, 함평 정씨가 12명, 남 양 홍씨가 10명 등 405명에 달해 전체의 70%에 달한다. 형을 받은 207명 중에서도 이들 성씨 중에 부안김씨가 31명, 의령 남씨가 26명, 전주 이씨 가 21명, 김해 김씨가 10명, 제주 고씨가 8명, 여산 송씨가 7명, 경주최씨 가 5명, 연안 차씨와 함평 정씨가 각 3명, 나주 임씨와 남양 홍씨가 각 2명 등 118명을 차지하여 전체의 57%를 차지함을 볼 수 있다. 3) 문중 서숙과 서당의 발달 대호지 지역은 종족마을이 발달되어 있어 문중의 자제를 교육시키는 종 숙들이 세워졌다. 이런 문중 서숙들이 발전하여 다른 문중의 자제들도 함 께 교육하는 지역의 의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한 서숙 중에는 도이리의 의령 남씨들이 설립한 도호의숙(桃湖義塾)을 비롯하여 밀양 박씨들이 1870년대 설립한 것으로 보이는 사성리의 반곡정사(盤谷精舍), 그리고 연 안 차씨들이 세운 적서리의 강당(講堂) 등이 확인된다. 도호의숙은 의령 남씨 가문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종숙(宗塾)으로 시작되었다. 종숙이 처음 문을 연 것은 의령 남씨 21세 종손인 남석구(南 錫龜, 1798~1868)와 그의 조카인 승지 남보영(南普永), 그리고 남계옥(南 啓沃)등에 의하여 1860년대 초로 알려진다. 그 후 도호의숙은 남보영의 아 들 청파공(靑坡公) 규희(圭熙, 1852~1902)에 의해 본격적인 학당으로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