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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 | 였다. 그는 주로 경서와 사기를 강학하였다. 초학자에게는 먼저『소학』을 강학 자료로 삼게 하고, 15세 이하는 반드시『격몽요결』을 강학하여 방향 을 정하게 하였다. 또한 화서학파의 문하생들이 경서를 돌려가면서 외우게 하는 방식으로 철저히 강학하였다. 그러나 유진하는 얼마안가 1906년 8월에 역질로 세상을 떴다. 갑자기 선 생이 죽자 의숙은 강학을 맡을 이가 없게 되어 그 후 1년여를 문을 닫게 되 었으며, 학생들은 각자 집에서 학업을 익혔다. 문중에서는 건암(健菴) 민정 식(閔正植)의 추천으로 유중교의 문인인 환성재(喚醒齋) 어취선(魚聚善)을 청주로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07년 11 월에 대흥에 사는 정기호(鄭嗜好)를 초빙하여 학생들이 다시 학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09년 2월에는 심원성(沈遠聲)을 강사로 초빙하였다. 그는 유진하와 연곡 노정섭의 문인이다. 도호의숙은 1910년 8월에 경술국치를 당함에 제대로 윤영되지 못했던 것 같다. 유진하의 문인으로 성균관 박사인 이철승이 도호의숙의 강사로 초빙된 것이 1914년 봄으로 보인다. 그는 존화양이론을 철저히 견지한 척 사계열의 유학자임을 알 수 있다. 이철승 역시 경사 위주의 교육을 시키면 서 제술 공부를 시켰다. 유학경전과 시문, 국사, 고례 등을 가르치면서 항 일 의식을 배양하였다. 도호의숙에서는 남상돈과 남상락을 비롯하여 남상혁(호: 克齋)·남상찬 (호: 絅齋)·남천우(호: 毅齋) 등 다수의 문인을 양성하였다. 도호의숙에서 철저한 위정척사론에 입각한 민족교육을 받은 학생들은 일제 강점기 항일 투쟁을 앞장서 전개하였다. 1919년 4월 4일 대호지에서 봉기한 만세운동 에도 집단적인 참여로 나타났으며 이들의 참여로 다른 지역보다 투쟁적인 만세 시위운동이 가능하였다. 당진의 대호지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4일 대호지 면장의 지시로 마을 주민들이 인근의 천의 장터까지 행진하며 전개한 만세운동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