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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7 Ⅴ. 도호의숙은 민족 교육의 산실 당진의 대호지면은 삼면이 바다에 접해있고 육로가 발달하지 않은 지리 적인 폐쇄성으로 인하여 오랜 기간 세거하는 집성촌이 발달하였다. 이에 따라 가문의 전통이 중시되는 보수적인 특성을 띄게 되었다. 더욱이 의령 남씨와 같은 충신을 배출한 가문의 충군애국적인 가풍은 지역 사회에 적잖 은 영향을 끼쳐온 것으로 알려진다. 도이리 일대에는 의령 남씨 충장공(忠 壯公) 남이흥의 후손들이 세거하였다. 의령 남씨가 대호지에 정착하게 된 것은 지금의 대호지면 일원과 천의리 승산리 일대인 해미현 서면을 남유와 남이흥의 사패지로 하사받게 되면서 부터이다. 남이흥의 불천위 사당 충장 사(忠壯嗣)에는 400여년 이어져 온 후손들의 충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들의 후손들인 의령 남씨는 도이리에 충장공 남이흥과 의천부원군 남 유의 충의 정신을 가학으로 계승하고자 도호의숙을 세웠다. 도호의숙은 의 령 남씨의 문중서당으로 도이리 풍곡에 있었다. 의령 남씨 종중에서는 1901년 단독 건물의 학교를 짓고 전답을 제공하여 운영비를 제공하는 등 조직적으로 운영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처음에는 문중의 한학자인 남규 희가 강학하였으나, 1902년 그가 세상을 뜬 후에는 노재(魯齋) 이성구(李 成九)와 고정(顧亭) 임노병(林魯秉)에 이어 1906년에는 존재(存齋) 유진하 (兪鎭河)를 선생으로 초빙하였다. 유진하는 경기 고양군 벽제 출신으로 성재 유중교를 가평의 한포서사로 찾아가 문하생이 되어 수학한 화서학파의 문인이다. 유진하를 훈장으로 모 셔오면서 도호의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학생 수도 늘어나 그해 서당이 비좁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그해 3월에는 의숙의 남쪽으로 바깥채 를 낙성했다. 이로써 수십 명을 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도호의숙에서는 유 진하를 훈장으로 초빙하고『대학』과『소학』한질을 구입하였으며, 학생들 에게 이항로의 문집인『화서집』한질을 초하게 하고『송자대전』도 구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