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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 남상직(南相直, 1894-1941, 호: 壯觀)은 도호의숙의 설립자인 남규희의 아들로, 1895년(을미년) 3월 10일에 도이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4일 대호지면(大湖芝面) 면사무소 광장에 모인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주재소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해 12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남정이 도 이리에 설립한 보명강습소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저서로『우주원론』과 『예악통경(禮樂通經)』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 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남성우(南成祐, 1897-1952)는 1897년 9월 16일생으로 주소지는 도이리 31번지이다. 직업은 농업이다. 22세에 4·4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왜경에 의해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로 체포되어 10월 27일 공주지방법원 에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현재 공주지방법원 판결문으로는 남성우가 유일한데 이에 의하면 대호지면 사무소 앞에서 조선의 독립을 도모할 목적 으로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그리고 천의 시장에 이르러 약 1,000명 의 군중과 함께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남성우를 필두로 천의주재소에 밀어 닥쳐 주재소를 파괴할 목적으로 투석을 하였으며 도주하는 순사보 유 익우를 추적하여 주재소 부근에서 손으로 두번 구타하였고 이에 힘을 얻은 군중은 유익우를 난타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남성우의 죄는 정치법 처벌령 위반, 소요, 상해 사건이 되었다. 그 후 남성우는 경성복심법원에 항소하였으나 12월 24일 기각되었다. 남성우는 1952년 향년 55세로 사망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86년 대통령 표창을 추 서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다시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