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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 인 창주공파( 州公派)가 수청리와 우두리 등에, 조금리에는 강열공파(剛 烈公派)가 거주하고 있다. 그 중에 차숙보(車淑輔, 1859-1945)는 평안도 관찰부 주사를 역임한 인물로 천석군으로 알려져 있다. 당진의병장 정주원 이 차숙보를 비롯한 차씨 문중의 보호를 받으면서 적서리에 훈련장을 만들 고 의병을 훈련시켰던 것으로 알려진다. 연안차씨로 창의사에 배향된 인물 은 차숙보의 아들인 차인영을 비롯하여 69명에 달한다. 이들 중에 차세순 만이 태형 90도의 형을 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대호지면의 의령 남씨는 남유와 충장공 남이흥의 후손들이 중심이다. 남 유(南瑜, 1552-1598)는 무과 출신자로 임진왜란 때 나주목사 겸 좌영장으 로 노량 해전에 참전했다가 이순신이 전사한 후에 독전하던 중 전사한 인 물이다. 남이흥(南以興, 1576-1727, 자: 士豪, 호: 城隱, 시호: 忠壯)은 선 조 35년(1602)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와 경상도의 병마절도사, 안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연안 부사가 되고,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되어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 평 안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중 인조 5년(1627)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이때 안 주에서 후금의 군사와 싸우다가 승산이 없자 성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그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이들의 후손 중에 무과급 제자가 50여명에 이를 정도로 조선후기 전형적인 무인 양반 가문이 되었 다. 이들 중에 대호지 3·1운동에 참여한 인물로 창의사에 배향된 이는 남 주원·남상집·남성우 등 59명이며, 이들 중에 11명이 건국훈장 애족장 을, 6명이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특히 이 중에 징역형 이상을 받은 인 물이 11명에 달하여 부안 김씨가 3명인 것에 비하여 다수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도 이들이 대호지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충장공 남이흥의 후손들은 남이흥의 유품과 그의 후손들의 유물들이 중 요민속문화재 등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1981년 모충관(慕忠館)을 건립하여